서울 내자동 세양빌딩 1층 김앤장 본사간판 앞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변호사 12명이 지난달 판사로 전직(轉職)했다. 지난달 18일 법원의 합격자 발표에 따르면, 이번 판사 채용 시험에서 김앤장 출신 합격률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규모도 이례적으로 컸지만, 12명 중 11명이 한창 ‘일을 배울’ 변호사 경력 5~6년 차의 30대였다는 점이 법조계에선 큰 화제가 됐다. “김앤장 쇼크(충격)”라는 말도 나왔다.

5년 이상의 법조 경력자를 뽑는 이번 판사 채용엔 검사도 60여 명 지원해 15명이 붙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검사의 경우, 현 정권이 검찰을 ‘개혁’ 대상으로 몰아붙이며 조직을 흔들어 놓은 게 작용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월등히 높은 급여로 보상받아 온 초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대거 판사로 옮긴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지적이다. 법조인들은 “판사, 검사, 변호사를 일컫는 ‘법조 삼륜(三輪)’의 균형이 무너지고, 판사 쏠림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3000명 판사 모두 왕(王)"

이번 판사 시험에 응시한 법조인들은 ‘자율성’을 지원 이유로 많이 꼽았다. 한 평검사는 “판사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종”이라고 했다. 김조원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아들 김모(34) 검사도 지난달 판사 채용에 합격했다. 또 다른 30대 변호사는 “로펌 변호사는 파트너(선임) 변호사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부속품이란 생각을 할 때가 많은데 판사는 사건 결론은 물론 재판·선고 날짜까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했다.

올해 법원이 채용한 경력 법조인. /그래픽=이철원

특히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직후 시작된 ‘사법 적폐’ 수사에서 100명이 넘는 판사가 직권남용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법원에선 ‘지시’ 자체가 사라졌다. 한 현직 판사는 작년 2월 내부 온라인망에 ‘선후배 판사라는 말을 이참에 버려야 한다. 모두가 동등해야 할 법원에서’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재판장 한 명과 배석판사 두 명으로 이뤄지는 민형사 합의재판부에서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기존엔 배석 판사가 판결문 초고(草稿)를 써오면 재판장이 오류를 고치고 법리를 더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요즘은 배석 판사가 ‘재판장도 직접 판결문을 쓰라’ ‘사건 논의(합의)는 대면할 것 없이 내부 메신저로 하자’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검찰 조서의 증거 능력을 대폭 제한하는 형사소송법이 올 초 국회를 통과하면서 판사의 권한은 훨씬 커지게 됐다. 3000명 판사 각각이 재판정에선 자기가 왕인 셈”이라고 했다.

◇"재판하다 퇴근해도 뭐라고 못해"

판사 지원자가 몰리는 또 다른 이유는 일과 개인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법원의 워라밸(Work Life Balance) 분위기 때문이다. 실제 한 지방법원에선 재판 중이던 한 배석 판사가 재판장에게 “오후 6시가 되면 칼퇴근 하겠다”고 해서 다른 재판부의 배석 판사를 법정 앞에 대기시키는 일도 있었다. 수도권의 다른 지방법원에선 배석 판사가 금요일에 판결문 초고를 재판장에게 이메일로 전송한 뒤 칼퇴근을 해, 재판장이 혼자 판결문을 다듬기도 했다고 한다.

수원지법은 작년 4월 법원 차원에서 ‘(재판부) 저녁 회식은 반기(6개월)에 1회로 하고, 매월 둘째·넷째 주 금요일은 야근 없는 날로 운영하자’는 권고안을 내기도 했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판사는 사건 처리 속도를 임의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칼퇴근 할 수 있다”고 했다.

사건 처리 기간은 점점 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올 6월 기준 지방법원의 민사·형사 재판 기간은 각각 평균 5.6개월, 5.1개월로 3년 전에 비해 1개월 정도 늘었다.

이번 판사 시험에 합격한 한 변호사는 “판사가 월급이 많지는 않지만 판사 경력을 쌓은 뒤 다시 변호사가 되면 몸값이 더 높아지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