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낮 12시 20분쯤, 서울 강동구에 있는 A아파트 상가 앞 공터에 토마토와 성주참외, 의류 등 택배 물품 800여개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이날 이곳 아파트의 현관 앞까지 배송될 예정이었던 택배들로, 롯데택배 2대와 우체국택배 1대 차량에 나눠 실렸던 것들이다. 이날 택배 박스는 단지별로 재분류돼, 찾아온 주민들에게 건네졌다. 주민 윤모(58)씨는 “물건이 훼손되거나, 물건에 이물질이 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다.

A아파트의 ‘단지내 택배차 진입 금지’ 논란이 2주 째 이어지고 있다. A아파트 입주민대책회의(입대회)는 지난 1일부터 단지 내 택배 차량의 지상 진입을 금지했다. 지하 주차장을 통해 배송 업무를 처리하라는 것이다. 택배노조는 8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쳐 입대회의 요구를 거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단지 입구까지만 물건을 배송하겠다고 했다. 입대회와 택배노조 양측 모두 “대화에 나설 수 있다”고는 하지만, 당장 갈등이 봉합되길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14일 오후 전국택배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택배 개별 배송 중단을 선언한 택배사들이 배송품을 쌓고 있다./ 장련성 기자

◇택배 대란, ‘공원형 아파트’서 일어나

이런 택배 대란은 차 없는 아파트를 표방하는 ‘공원형 아파트’ 단지에서 주로 일어난다. 이런 단지는 소방차와 이삿짐 차량 등 필수 차량을 제외한 모든 차량을 지하 주차장을 통해 출입하도록 요구한다. 택배노조에 따르면, 택배 차량이 단지로 진입할 수 없는 아파트 단지는 400곳이 넘는다.

문제는 지하 주차장의 높이다. 일반적인 택배 차량의 높이는 2,5~2.7m인데, A아파트와 같은 공원형 아파트 지하 주차장 높이는 2.3m에 불과하다. 지하 주차장으로 출입하기 위해선 150만원을 들여 일반 차량을 차고가 낮은 저탑 차량으로 개조해야 한다. 저탑 차량은 높이가 낮은 탓에 노동 강도와 시간이 늘어난다. 택배노조 민준기 롯데강동지회장은 “저탑 차량에서 허리를 굽히고 일하다 보면 고관절에 무리가 가고, 무릎에 굳은살이 박힌다”고 했다.

정부는 2019년 1월 ‘공원형’ 아파트 지하 주차장 높이를 2.7m 이상으로 만들라며 법을 개정했지만, 그보다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들에선 택배 배송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입주민이 ‘전동 카트’ 구매…문제 없이 배송”

15일 오후 1시 기준 A아파트 입주민과 택배 노조의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해결 방법은 없을까. A아파트와 같은 갈등을 겪다가, 합의를 통해 대안을 제시한 사례가 실제 있다.

세종시 보람동 호려울마을 10단지도 A아파트와 같은 공원형 아파트다. 이 단지는 입주가 시작된 2016년 초부터 택배 기사와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 없이도 문제없이 택배를 배송하고, 배송 받는다.

해결책은 단지 입구에 놓인 ‘전동 카트’ 2대였다. 택배 기사들은 단지에 진입하지 않고도 전동 카트를 통해 집집마다 물품을 배송할 수 있다. 입주민들은 1대당 1000만원이 넘는 전동 카트를 적립금으로 구입하고, 1년에 200만~300만원 정도 드는 카트 충전·바퀴 수리비, 50만원의 자동차 보험료 등을 지속적으로 부담하고 있다.

◇주민이 직접 찾아가는 ‘택배 보관소’ 마련도

택배보관소를 마련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한 단지도 있다.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한 B아파트에서는 지난 2014년 후문 근처에서 입주민의 아이가 택배 차량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B아파트는 정문과 후문을 두고 있는데, 지상 도로와 주차장이 마련된 정문과 달리 후문은 지하 주차장으로 바로 연결된다. 후문에서 지상으로 가려면 인도로 올라서야만 한다.

당시 입주민들은 투표를 통해 택배 차량의 후문을 통한 지상 진입을 금지했다. 택배 기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관리사무소에서 낸 묘안이 ‘택배 보관소’였다. B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입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지난 2015년 후문 옆 커뮤니티 시설에 택배보관소를 설치했다”며 “처음에는 불편하다고 하는 입주민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입주민과 택배 기사 다들 적응해 얼굴 붉힐 일 없이 지내고 있다”고 했다.

택배차량이 아파트 단지 진입을 못해 발생한 '택배 대란' 현장인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후문에 5일 오후 지상주차통제 안내문만 설치되어 있다. 이 아파트 지하주차장 출입구 높이는 2.3m로 이보다 높은 택배차량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왼쪽은 지하주차장 입구. /뉴시스

◇안전 우려? 아이 학교간 시간대에 택배차 진입 허용

시간대를 정해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허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울산 남구 옥동의 C아파트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4시간동안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총 세대수가 263세대라, 오전 11시에서 11시 20분 사이에 시작하는 배송 업무는 보통 오후 1시 30분이면 끝난다.

C아파트는 지난 1월 지상 출입을 금지하며 ‘갑질 아파트’ 오명이 붙었다. C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갑질' 당사자가 된 입주민들의 불쾌감이 매우 커, 갈등의 골이 깊었다”고 했다.

택배 노조 측에서 해결책을 내놨다. 4시간 동안 지상을 출입하되 차량 속도를 시속 10km 이내로 제한하고, 공회전 금지를 위해 시동을 끄겠다고 했다. 입주민들은 지난 2월 15~16일 주민 투표를 했고,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재 개발중인 우체국의 ‘자율주행 무인우체국’ 시스템이 장기적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택배 박스를 실은 로봇이 단지 입구에서 물건을 배송하면, 앱 알림을 받은 사람이 1층으로 나와 받는 방식이다. 다만, 아직 아파트 단지에서 운행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올해 후반기 세종시 자율주행 특화지역 내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 ‘자율주행 무인우체국'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구체적으로 어느 아파트에 어떻게 사업을 진행할지는 구상 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