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한 일반고 사회 교사는 최근 고3 아이들에게 ‘사회집단과 일탈’이란 주제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갑자기 질문했다. “선생님, 일탈이 뭔가요?” 이 교사는 ‘일탈(逸脫)을 모르나?’라고 생각하곤 다시 질문했다. “무슨 뜻일 것 같니?” 그러자 여기저기서 대답이 터졌다. “’일상 탈출'의 줄임말요!” 이 교사는 “중3도 아니고 내년 대학생이 될 고3 아이들이 이 정도”라면서 “아이들에게 교과서 속 단어 뜻을 설명하는 데만 수업 시간 절반을 쓰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글을 읽을 수 있지만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 문맹(文盲)’인 아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인 ‘문해력(文解力)’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얘기다. 본지가 한국교육정책연구소에 의뢰해 ‘중3 문해력 진단 검사’를 해보니 10명 중 3명(30.8%)만이 중3 수준에 맞는 문해력을 갖추고 있었고, 나머지 7명(69.2%)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자기 학년 교과서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박제원 전주완산고 교사는 “코로나 여파로 대면 수업이 거의 이뤄지지 못하면서 심각했던 문해력 공백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16일 오전 서울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인 문해력 평가 문제를 풀고 있다. 2021. 4. 16 / 장련성 기자

한국교총과 함께 지난 2~9일 전국 초·중·고교 교사 1152명을 상대로 문해력 실태에 대해 물어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한 실업계 고교 교사는 “취업처에서 도장공(페인트 등을 칠하는 인부)을 모집한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취업할 생각 있냐’고 했더니 고3 아이들이 ‘태권도 잘해야 하나요?’ ‘도장 파는 건가요’라고 묻더라”고 전했다. “수학 ‘삼각형의 내각’ 내용이 나오자 ‘삼각형은 각이 세 개인데 왜 내각이냐(’네 각'과 혼동)?’고 질문이 나왔다.”(중학교 수학 교사), “‘문상(問喪)’이란 말을 다들 ‘문화상품권의 줄임말’로만 알고 있었다.”(중학교 한문 교사)

박정현 한국교육정책연구소 부소장은 “10대 시절 문해력 결핍이 수년간 쌓이면 훗날 사회적 격차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방치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본지와 한국교육정책연구소가 공동으로 실시한 문해력 진단 검사는 지난 12~16일 서울 중구 A중·마포구 B중 3학년 학생 39명(남 22명·여 17명)을 대상으로 측정했다. 중3 아이들이 학습할 때 꼭 이해해야 하는 낱말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중학교 3학년 교과서를 기반으로 국어·역사·과학 과목에 나오는 주요 어휘를 보여주고, 글의 전체 맥락과 어우러지는 적절한 단어가 무엇인지 맞히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예컨대 ‘고려는 몽골군을 [철군/철회]시켰다’란 문장에서 ‘철군’과 ‘철회’ 중 어느 단어가 적절한지, ‘서양 문물은 중국 사신들을 통해 [전래/전승]되었다’란 문장에서 ‘전래’와 ‘전승’ 중 어느 단어가 들어가야 하는지 맞히는(정답은 철군, 전래) 것이다. 총 19문항(객관식 15개, 단답식 3개, 서술형 1개)을 10분간 검사했다.

◇5명 중 1명은 ‘2년’ 뒤처져

그 결과 검사 대상 39명 중 30.8%(12명)만 제 학년 수준인 ‘중3′ 수준 문해력을 갖췄고, 46.2%는 ‘중2′ 수준, 20.5%는 ‘중1’ 수준, 2.6%는 전체 문항 절반도 맞히지 못해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중3 수준’이라는 것은 누군가 도움 없이 자기 학년 교과서와 교재를 대체로 잘 이해하고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문해력 검사를 설계·출제한 박정현 한국교육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얼핏 점수가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꼬치꼬치 물어보면 정확하게 단어를 이해하는 학생들은 극소수”라면서 “교과서를 읽을 때 단어를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으면 수업 진도를 못 따라가는 아이들이 10명 중 7명이란 결과”라고 말했다. ‘정교한 기계’에서 ‘정교한’의 뜻을 아는 대로 적으라는 문제에서 12.8% 학생이 답지를 빈칸으로 두거나, ‘진정한, 정해진?’ ‘완벽하다’ ‘깔끔하다’ 등으로 썼다.

검사를 마친 A중 3년생 박모(15)양은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은 단어들인데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어려웠다”며 “특히 주관식 문항에서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문장이 나왔는데, 그런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B중 3년생 이모(15)군도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라는데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 놀랐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은 “단어가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린다”는 반응을 내놨다.

◇”심각한 위기에 놓인 아이들”

현장 교사들은 단어 뜻을 몰라 교과서를 읽지 못하고, 진로적성검사 문제를 풀지 못하며, 중간·기말고사 문제도 풀지 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하소연한다. “두 값의 합을 구하라는 말을 문제의 답이 ‘2개’라고 생각한다.”(중학교 수학 교사)”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알더라.”(고교 교사) “고지식이란 말을 ‘높은 지식’으로 이해하더라.”(고교 영어 교사)…. 교사들이 겪은 당황스러운 경험담은 끝이 없다. 경기도 김포시 한 중학교 사회 교사는 “해가 갈수록 어휘력이나 글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그나마 전에는 ‘이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이젠 모르면 유튜브부터 찾아보지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신명선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문해력 핵심이자 첫 발걸음이 어휘인데, 학교에선 어휘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국가에서도 아이들 문해력 검사를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정현 한국교육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서울 지역 학생이 저 정도인데 지방이나 수도권 외곽에 사는 학생들은 더 심각할 것”이라면서 대책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