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3년째인 ‘QS 아시아 대학 평가’에서 한국 대학들 하락세는 심각했다. ‘톱 20위’ 이내에 든 우리나라 최상위권 대학들의 평균 순위는 지난해 13.3위에서 올해 15.6위로 두 계단 넘게 하락했고, 2012~2015년 연속으로 ‘아시아 톱 10′에 이름을 올렸던 카이스트·서울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났다. 역대 최저 순위다. 교육계에서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인 고등 교육 경쟁력의 하락을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나라 대학이 ‘아시아 이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연구 질, 교육 환경마저 악화일로
그동안 우리나라 대학은 외국인 교원 비율, 국제 연구 협력 등 국제화 지표에서 싱가포르·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올해 아시아 대학 평가에서 나타난 한국 상위권 대학들의 순위 하락은 대학 교육의 핵심인 연구의 양과 질이 동시에 악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예컨대 교수들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연구를 했는지 나타내는 ‘논문 피인용 수’ 지표에서 서울대 순위는 지난해 48위에서 올해 63위로 15계단이나 하락했다. 카이스트는 논문의 양을 나타내는 ‘교원당 논문 수’ 지표가 10위에서 18위로, ‘논문 피인용 수’ 지표는 28위에서 33위로 내려갔다.
우리나라 대학의 열악해진 연구·교육 환경도 순위 하락의 원인이다. ‘교원당 학생 수’ 지표에서 서울대(24위→40위), 성균관대(32위→37위) 등 상위권 대학의 순위가 하락했다. 박사학위 교원 비율도 카이스트(1위→26위) 등 상위권 10개 대학 중 6개 대학의 순위가 전년보다 떨어졌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13년째 등록금이 동결되고 대학 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교원들 빈자리를 겸임·초빙 강사로 채우는 대학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재정난 시달리는 대학, 돈줄 쥐고 흔드는 정부
교육계에서는 우리나라 대학의 순위 하락은 상당 부분 사립대의 위기에서 출발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 대학의 85%는 사립대인데, 13년째 대학 등록금이 동결되고 입학금도 폐지되는 등 사립대 재정이 크게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대학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인상 한도(소비자 물가상승률의 1.5배)까지만이라도 등록금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학령인구 감소로 신입생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사립대가 속출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부실 대학을 걸러내는 ‘대학 기본 역량 진단’을 실시하면서도 개별 대학의 정시 수시모집 비율, 등록금 인상 여부, 시간강사 비율 등 세세한 부분까지 줄 세워 ‘대학 옥죄기’를 할 뿐, 정작 부실 대학을 퇴출시키고 우수 대학을 전폭 지원하는 데는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다. 부실 대학 정원을 대폭 감축하고 한계에 이른 대학은 자진 폐교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법안도 ‘부실 사학에 대한 특혜’라는 여당 반발 때문에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이건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학에 예산을 나눠줄 때 지금처럼 정부가 돈줄을 쥐고 일일이 나눠줄 게 아니라, 대학 총장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고 자유롭게 쓰도록 해야 한다”며 “나중에 제대로 평가해서 실적이 없으면 예산을 확 줄이는 식으로 자율성과 책임을 동시에 줘야지, 지금처럼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나눠주면 경쟁력 있는 학문 분야도 발전시킬 수 없다”고 했다. 지난 7월 대학총장들의 모임인 대학교육협의회는 정부에 초·중·고교 예산처럼 일정 비율을 대학에 지원하는 ‘고등교육재정교부금’을 만들어 달라고 정식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현실에 안주하는 대학의 안이함이 고등 교육 위기를 부추겼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교수들은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연구 주제를 파고들기보다 안전한 연구를 선호하고, 각 대학에서도 학과 구조조정을 시도할 때마다 ‘학과 이기주의’ 때문에 무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은 “전 세계가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혁신을 부르짖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문·이과를 넘나드는 융합형 인재가 필요하다 하면서도 대학들이 학과별 칸막이를 아직도 허물지 못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라고 했다.
중국·싱가포르·대만 등 아시아 경쟁 대학들이 놀랄 만한 속도로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대학 교육의 악화가 더 가속화될 거란 전망이 나온다. 국제화에 이어 연구 질과 교육 환경마저 열악해지면 앞으로 학계 평가, 졸업생 평판까지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김정호 카이스트 교수는 “현재 유력한 대선 후보들만 해도 과학기술이나 대학 교육 혁신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과학산업 경쟁력이 유일한 우리나라의 경쟁력인데 이렇게 계속 대학 경쟁력이 추락하면 결국 전 사회적인 막대한 손실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QS 대학평가
’조선일보·QS 아시아 대학 평가’는 학계 평가(30%), 졸업생 평판도(20%), 교원당 학생 수(10%), 박사 학위 교원 비율(5%), 교원당 논문 수(5%), 논문당 피인용 수(10%), 국제 연구 협력(10%), 외국인 교원 비율(2.5%), 외국인 학생 비율(2.5%), 해외로 나간 교환학생(2.5%), 국내에 들어온 교환학생(2.5%) 등 총 11개 지표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