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천(71) 울산대 총장은 입지전(立志傳)적인 리더이다. 초등 4년인 만 아홉살 때 충남 공주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떼를 써 1960년 봄 동대문구 창신동 단칸방에 세 들어 유학한 것부터 그렇다. 서울대 총장 4년 임기후 지역 사립대 총장을 맡고 있는 것도 범상찮다.
◇실패와 역경 이기고 挑戰
하지만 그는 중학교 입시 낙방을 필두로 숱한 ‘실패’를 맛봤다. 행정고시 3번 탈락, 서울대 행정대학원 불합격, 3수(修)만에 서울대 교수 임용…. 그럼에도 쉼없이 전진(前進)했다. 서울대 총장 선거에 출마한 2006년 당시, 전체 교수 1733명 중 오 총장이 소속한 행정대학원의 교수는 총25명(1.4%)에 그쳐 도전 자체가 무모(無謀)해 보였다. 그러나 한 차례 패배를 딛고 2010년 총장 선거에서 그는 1차 투표 과반수로 당선됐다.
그가 울산대 총장을 맡은 지 8년째인 올해 지난달 28일, 비영리 교육단체인 ‘세계대학랭킹센터’(CWUR)는 ‘2022-23 세계대학 순위’ 평가에서 울산대를 국내 10위, 세계 420위로 매겼다. 우리나라 비수도권 사립 종합대학 중 가장 높은 성적이다. 정부 지원 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평가에서 울산대는 10년 연속 우수 평가를 받았다. 기자는 지난달 말 울산대를 찾아가 오연천 총장을 만났다.
- 서울대 총장 가운데 지역 사립대 총장을 맡은 전례가 있나?
“선우중호 서울대 총장(1996년 2월~98년 8월)께서 명지대 총장을 거쳐 국립 광주과학기술원(GIST) 총장을 지냈다. 하지만 지역의 사립대 총장은 내가 처음인 것 같다.”
◇서울대 총장 출신의 첫 지역사립대 총장
- 굳이 울산대 총장이 된 이유라면?
“울산공업학원 이사회가 ‘그간 쌓은 경험을 활용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나로선 ‘내 경험이 유용하게 활용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해 흔쾌히 수용했다. 30년여간 교수로서 내가 추구해온 삶에 적합하고 일관성도 있다고 봤다.”
- 대학 총장들이 종종 국무총리로 발탁됐는데.
“우리나라에선 ‘중요 대학 총장을 했으면 주목받는 고위 공직자를 해야 되지 않느냐’는 시선 또는 기대가 있는데, 이는 허상(虛想)일 뿐이다. 일본에선 대학 총장이 총리가 된 사례가 없고, 미국은 우드로우 윌슨 프린스턴대 총장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게 유일하다.”
그는 “총장 출신이 정무직을 맡으려면 본인의 정치적 철학과 입장, 가치관이 해당 정치 권력과 어떻게 부합하는지 분명하게 선언(宣言)하는 게 오랫동안 학자였거나 대학을 대표해온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본다”고 했다.
- 10년 넘게 대학을 이끌고 있는데 총장의 역할과 사명은 무엇인가?
“교수와 학생, 직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그들의 역할과 책임을 잘 배분·격려하는 일이다. 구성원들이 고유 업무에 헌신하고 매진(邁進)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를 독려하면서 장애물들을 찾아내 개선해야 한다.”
◇“교수들이 대학의 품질과 존재 가치 결정”
- 대학에서 총장과 교수의 관계는?
“총장은 대학 공동체의 중심축을 맡고 있지만 한 명의 구성원일 뿐이며, 개별 교수들이 더 중요하다. 교수들이 어떻게 헌신하고, 학생들에게 미래 비전을 심어주느냐가 대학의 품질과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 총장이 바뀐다고 해서 교과 과정이나 강의 내용이 금방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작금의 한국 대학 상황을 진단한다면?
“거의 모든 대학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적으로 새로운 지식에 대한 수요가 변화하고, 자기주도·자율학습 기회가 넓어져 고등교육에 대한 보편적 수요가 낮아진 영향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은 정원 유지나 교육부 지원에만 매달릴게 아니라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본질적 역량 배양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
그는 “예를 들어 ‘대학 교육을 마친 사람의 사고와 의식이 얼마나 견고해졌느냐. 문제해결 능력이 얼마나 좋아졌느냐?’ 이를 키우는 방향으로 나가야 대학이 존재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집중적 고민과 노력 없는 외형 위주 접근은 위험하다”고 했다.
- 정작 우리나라 대학 시스템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현재 대학 시스템은 20세기 중후반에 형성돼 50여년 지속돼왔다. 그동안 학문에 대한 수요와 관심, 영역 구분은 급변하고 있다. 모든 학문이 인접 학문과 융합하고 연계돼 복안(複眼)학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 시스템, 미래지향적으로 재구성해야”
그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 시스템은 학부와 학과, 필수·선택 과목 등으로 너무 경직돼 있고, 미래지향적 교과과정 개편 노력이 미진하다. 그걸 유연하게 만들어 대학의 본질적 가치를 수행토록 해야 한다. 학제와 학문의 재편성 문제는 범국가적 과제이다. 곧 출범하는 새 정부는 이 문제를 대학 개혁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어느 학생이 경영학과에 입학해 동남아 섬유산업 경영으로 자기 전공을 설정했다고 치자. 이 학생은 재학중 인문대에서 동남아의 문화적 특성을, 경영학과에서 경영학 일반과 경공업 경영 사례를, 공대에서 기본적인 섬유기술을 배운다. 이렇게 되면 이 학생은 취업시 기본 역량을 인정받아 입사 초부터 문제해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 대학입시와 입사 시험 등이 온통 주입식 암기교육 위주인데, 이게 가능할까?
“지금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첨단 지식과 정보를 언제든 맘껏 흡수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중·고교 수업부터 바뀌어야 한다. 학생의 사전(事前) 학습을 기본으로 하고, 본 수업에선 문제점 파악과 의미 부여 등 본질을 확인하며 지식의 주인(主人)이 되면서 가치 창출 방향을 상상해야 한다.”
◇“교수들이 먼저 대학 위기 돌파에 나서야”
오 총장은 이어 말했다.
“고교부터 대학 1~2년까지 기본 역량을 갖춘 뒤 ‘자기주도 전공’을 선택해야 한다. 이게 가능하려면 칸막이식(式) 학과별 장벽을 유연하게 만들어 학제 분류를 새롭게 하고 전공 선택의 유연성을 유지해야 한다. 대학 교수들부터 20~30년 가져온 고정관념과 방식을 내려놓고 미래 가치를 지향하는 본질적인 토론을 벌일 수 있도록 새로운 시스템 구축에 나서야 한다.”
- 교수들의 각성과 선택이 핵심이란 얘기인가?
“그렇다. 지금 학령(學齡) 인구 급감과 10년 넘는 등록금 동결로 거의 모든 대학들이 재정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고 돌파하려면 교수들의 자발적이고 선제적인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교육자의 헌신이 없으면 교육 내용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고, 연구자의 투혼(鬪魂)이 없다면, 연구지원비도 무의미하다. 대학 구성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혁신에 앞장서야 한다. 대학의 노력과 국가의 지원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대학은 미래 사회의 동력원 돼야”
오 총장은 “대학의 본질적 가치는 미래 사회의 동력원이 되는 것”이라며 “특히 우리나라 대학들은 글로벌 경쟁력, 미래 경쟁력 확보에 변화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글로벌 경쟁력이 높은 나라로 꼽히는 네덜란드에서는 웬만한 대학생들의 영어가 원어민 수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외 경제 의존도는 네덜란드 보다 더 높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공학도나 의학도, 인문학도 모두 영어와 소통력 등 글로벌 역량을 학부 재학 중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학생이 미래지향적 전략(戰略) 전공을 찾아야 한다.”
- 글로벌 경쟁력 확보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는 미국·일본·중국 보다 소국(小國)이며 지리적으로도 불리하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가 G10(세계경제 10위), G7(세계경제 7위)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개별 주체들이 미·중 등 경쟁국 보다 최소 20~30% 더 노력해야 한다. 이는 기업인, 공무원, 교수, 언론인, 대학생 모두에 해당된다. 더 철저하게 협상을 준비하고, 더 풍부한 교양과 세련된 매너로 신뢰 받고, 리스크 대비도 더 완벽해야 한다.”
◇“정부 대학 지원, 일반교부금 방식으로 바꿔야”
- 산적한 대학 현안 중 가장 시급한 것을 꼽는다면?
“지나치게 파편화돼 있는 정부의 대학에 대한 재정 지원과 배분을 통폐합해 대학의 필수적 기본 역량을 보강해 주어야 한다. 중앙정부가 지자체에 매년 일반교부금을 주듯, 사립대학을 포함한 대학에 일반교부금 방식으로 지원했으면 한다. 지금은 자원과 규제의 비효율과 낭비가 심하다. 대학의 보편적 지출 수요에 상응하는 예측가능한 자원 배분을 통해 각 대학들이 지출 분야를 자율적으로 선택해 특화(特化)할 수 있다.”
- 울산대 총장으로서 가장 주력하는 분야는?
“울산에 있는 900여개 대·중소 기업들과의 산학(産學) 협력을 심화하고 융합적 가치를 부여하려 애쓰고 있다. 산학 협력의 핵심은 대학과 기업이 진정성을 갖고 돕는 것이다. 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과 기술을 꾸준히 공급하고, 기업은 대학이 맡아야 될 기대와 비전을 잘 전달해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한 크루세이더(Crusader·운동가) 역할에 주력하고 있다.”
- 그동안 이룬 성과라면?
“산학 협력 강화 차원에서 5년 전 정부 지원과 자체 재원으로 ‘산학협력 융합 전담 캠퍼스’를 별도 완공해 첨단소재 공학부와 화학과가 입주해 있다. 2017년 아시아지역 총장 회의를 국내 최초로 열었고, 교수 및 직원 채용 기준을 상향 조정하고 예산 절감 같은 구조조정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실패는 나의 부족함 깨우쳐 주는 선물”
- 어려움을 딛고 매번 오뚝이처럼 일어선 원동력이라면?
“실패는 나의 부족함을 깨우쳐 주는 선물(膳物)이라고 여겼다. 초등학교 졸업후 중학교 입시에 실패한 후 서울 남산도서관에 출근하며 ‘실패의 쓴맛을 다시 맛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며 다짐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나 자신을 낮추려고(discount) 노력했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했다.”
- 미국 유학 시절은 어땠나?
“행정고시 합격후 5년 만에 공무원을 스스로 그만두고 뒤늦게 공부하느라 매일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대학도서관으로 가서 밤 12시~새벽 1시에 돌아왔다. 생활비를 벌기위해 2년 동안은 한 여름 주말(週末) 섭씨 30도 넘는 뙤약볕에서 10시간 넘게 노점상 일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어떤 부자들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랬더니 모든 피곤함이 사라지고 새 힘이 솟더라.”
◇“남을 돕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가치”
- 지금도 신문을 열심히 읽는가?
“그렇다. 요즘은 매일 아침 6개의 신문을 구독하는데, 좋은 기사는 스크랩했다가 다시 정독한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일간종합지를 읽었고, 고교 시절엔 학교 영자(英字)신문 편집장을, 대학 재학 중에는 대학신문기자를 했다. 4년 유학시절 내내 매일 오전 2시간동안 뉴욕타임스(NYT)를 탐독했다. ‘신문은 지혜의 보고(寶庫)’라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말씀에 동감한다.”
- 마지막으로 본인이 터득한 삶의 원리나 가치관이라면?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를 토대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게 인간 관계의 본질이며, ‘남을 이해하고 돕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대 총장 취임 첫날 점심을 100여명의 수위, 청소원, 경비원 등과 함께 했다. 리더의 제1덕목(德目)은 겸손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