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4일 오전 11시쯤 기자는 부산시 사상구 주례로에 있는 동서(東西)대학교를 찾았다. 뉴밀레니엄관 3층 ‘Media Outlet’(미디어 아웃렛) 표지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입사지원서’를 쓰고 있는 학생 80여명이 보였다.
‘미디어 아웃렛’은 동서대학교가 현장 체험형 수업(In-School Field System)의 일환으로 2015년 도입한 ‘가상(假像) 회사’이다. 방송영상·광고홍보 전공 학생 각 40명씩, 총80여명이 3학년 2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1년 동안 4학점을 따야 하는 필수 과정이다.
◇사원증·명함에 야근도...1년 필수 코스
MBC PD 출신인 오종서 교수는 “여기에선 학생은 사원, 교수는 본부장, 수강신청은 입사지원, 활동 분야는 근무 부서로 바꾸어 부른다”며 “매일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당직 근무를 서는 등 회사 생활과 똑같이 한다”고 말했다.
방학기간인데도 이날 출근한 학생들은 산하(傘下) 4개 본부 소개를 듣고 본부장(교수)과 1대1 면담을 했다. 본부장들은 이를 토대로 이달 1일 ‘사내 인사 발령’을 내 근무 부서를 정했다. 학생들은 학기 마다 프로듀서(PD), 작가, 감독(편집·촬영 등), 홍보행정을 각기 맡아 일한다. 호칭도 ‘000 PD’, ‘000 작가’로 부른다.
올 7월 ‘미디어 아웃렛’을 수료한 김은빈 학생(24·4학년)은 “이름, 근무 부서가 찍힌 명함과 사원증을 갖고 주간(週間)업무 일지를 작성하며, 업무 스킬은 물론 회사 생활에 필요한 에티켓과 예의범절도 익혔다”고 했다.
◇부산시 區 영상물 제작...다면평가로 학점 매겨
‘미디어 아웃렛’에서는 방송 촬영·제작의 기초부터 고급 단계까지 실습 위주 실무(實務) 교육을 한다. 방송작가 출신인 박미선 교수는 “매학기 마다 학생들이 부산 시내 1개구(區)를 맡아 영상물을 발굴·제작한다”며 “자체 OTT채널 방송국인 ‘모카(MOCA)’에 매일 편성표를 짜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모카’에는 2000여편의 영상물이 업로드돼 있는데 학생들이 모두 제작한 것이다. 방송의 품질과 평소 근무 태도 및 협업(協業·팀 플레이) 능력·자세 등을 다면(多面)평가해 학점을 매긴다. 올해로 8년째인 ‘미디어 아웃렛’은 교육부 주관 ‘산업계 관점 대학평가’에서 2015년과 2019년 미디어분야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됐다.
방송영상학과 졸업생인 강승민(28) 부산일보 디지털사업국 PD는 “동영상 및 방송 제작 실무와 기술 외에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대인(對人) 관계 노하우를 얻은 게 큰 자산이 됐다. 덕분에 취업도 뜻한 대로 잘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동서대학교는, 대한민국 국회부의장을 지낸 고(故) 민석(民石) 장성만(張聖萬·1932~2015) 목사가 ‘기독교 정신의 구현’을 건학(建學) 이념으로 1992년 세웠다. 교훈(校訓)은 ‘진리·창조·봉사’이다. 현재 1만 2800여명의 학생과 800여명의 교직원들이 ‘My Bright Future’(미래로 이어주는 희망의 청사진)라는 슬로건 아래 공부와 학문 연구, 경험 쌓기에 매진하고 있다.
◇‘레드닷 국제디자인’ 대회...8년간 80명 수상
동서대의 명성(名聲)은 부산을 넘어 세계 무대로 확산하고 있다. 기업 종사자와 대학생이 동등한 조건에서 참가해 경쟁하는 ‘레드 닷 디자인’(Red Dot Design Award) 같은 글로벌 디자인 공모대회에서 재학생들이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어서다. 2015년부터 올해까지 8년 연속 80명의 동서대 학생들이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受賞)했다.
2022년 대회에선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the Best)’ 1명과 ’위너(Winner)’상 9명 등 10명이 상을 받았다. 올해 레드닷에 출품된 1만여개 작품 가운데 ‘베스트 오브 베스트’ 수상자는 10명 뿐으로, 동서대 학생이 최상위 0.1%에 뽑힌 것이다.
올해에는 세계 3대 광고제인 뉴욕페스티벌에선 은상(銀賞)과 동상(銅賞) 등 11개, 클리오 어워즈(Clio Awards)에선 은상 2팀, 동상 1팀, 쇼트리스트 1팀 등 4개가 입상했다. 1959년부터 매년 열리는 클리오 어워즈에서 올해 대학생 수상작품 총 27개 가운데 4개를 동서대가 차지했다.
류도상 디자인대학 교학부장은 “이런 쾌거는 디자인대학과 소프트웨어학과, 광고홍보학과 등 3과 학생들이 융합수업으로 시너지 효과를 낸 덕분”이라며 “매학기마다 너무 많은 학생들이 수강신청해 와 포트폴리오 심사(審査)를 거쳐 30명 수강생을 엄선한다”고 말했다. 학교는 해외 공모전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국제선 왕복항공비와 현지 숙박비, 제작 경비 등을 지원한다.
광고홍보학과 4학년인 이 홍(23) 학생은 “올해 융합수업을 들은 수강생 30명 중 24명이 크고작은 국내외 디자인상을 받았다”며 “6명은 이미 서울의 유수 광고홍보대행사에 채용됐다”고 말했다.
◇강의실·교수 없는 ‘X클래스’...‘Q칼리지’의 파격
동서대학교가 2·3학년생 대상 1년 과정으로 2021년 9월 시작한 ‘Q칼리지(college)’는 전공·학과 장벽을 없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의 전형(典型)이다. Q는 ‘스스로 질문(Question)해 도전 과제를 정하고, 스스로 답을 찾으며(Quest), 빠르게 성장(Quantum Jump)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향점은 변화(Change), 도전(Challenge), 상상실현(Champion) 3개다. 1기생 36명이 각기 15학점을 채우고 지난달 수료했다.
곽준식 ‘Q칼리지’ 학장은 “학생마다 원래 전공인 ‘본캐릭터(본캐)’와 별도로 부캐릭터(부캐·Sub Character)를 키우도록 돕는다는 취지”라며 “공학 전공자가 여행작가가 되거나, 인문대생이 영화감독이나 웹툰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첫 학기에는 전공 구분 없는 융합수업을 들으며 각자 도전 아이템을 정한다. 강의실과 교수, 시험 등 4가지가 없는[4無] 창의융합형 엑스클래스(X-Class) 수업이다. 시험은 팀 단위 프로젝트 결과로 대신한다. 두 번째 학기는 미국·아시아·부산에서 각 10명씩 현지 수업을 하는 ‘퀀텀 점프’ 과정으로 운영한다. 학생 지도는 여러 전공의 교수 13명이 멘토로 참여한다.
온라인 스마트 스토어 창업을 시도하던 문재우(25·국제통상학 4년) 학생은 ‘Q칼리지’ 수강 후 애견(愛犬) 카페 겸 수제(手製) 베이커리로 창업 분야를 바꾸었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학교와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진짜 하고 싶던 창업을 하게 돼 만족한다”며 “웹툰 작가, 영어 동화 작가가 되려는 동기생도 있다”고 말했다.
◇학부제 없애고...9개 단과대 52개 학과로 개편
동서대학교는 올 9월부터 기존 학부와 계열을 모두 폐지하고 9개 단과대학 52개 학과(學科) 체제로 개편했다. 학제(學制)가 융복합 위주로 가는 시대 흐름을 거스른다는 지적에 대해 남호수 교학부총장은 “개별 학과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단과대학 별로 경쟁력을 더 높이려는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1학기부터 인공지능(AI), 빅데이터, 경험디자인 같은 12개의 융합 연계전공 과정과 177개의 마이크로디그리(Micro Degree·소학위) 코스를 시작해 학과간 ‘벽’을 낮추고 융합교육을 내실화했다”고 밝혔다. 전공 교육의 수월성(秀越性)과 학과간 융복합성을 높여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복안이다.
미래형 수업도 대거 확충(擴充)하고 있다. 세계 유명대학 온라인 강좌 무제한 수강과 할리우드(Hollywood) 현장을 연결하는 원격 강의, ‘동서고금(東西古今)’이란 비(非)교과 온라인 사이트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다 O2O(On-line to Off-Line) 수업을 통해 지식(知識)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쌓고, 학교에선 프로젝트형 교육을 늘리고 있다.
‘동서고금’ 사이트의 경우, 인문·사회·예체능·과학기술 등 7개 범주에 4000여개 강의 및 학습 동영상이 있다. 등록한 재학생들은 언제든 자유롭게 이 사이트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으며, 일정 이상을 마치면 이수증(履修證)을 받는다.
◇‘동서고금’ 온라인 사이트...美·中 현지 캠퍼스
동서대학교는 글로벌 교육에도 남다르다. 매년 100명의 학생을 뽑아 전액 학교 지원으로 미국 LA 호프대학교에 50명, 중국·일본에 50명씩 보내는 해외 학습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미국과 중국에 현지 캠퍼스도 운영 중이다.
2020년 기준 동서대 재학생 가운데 외국인 유학생 비율(7.8%)은 부산대(4.7%), 부경대(6.4%), 동아대(2.8%)보다 높았다. 이는 2011년 중국 우한(武漢)시 소재 중남재경정법대학과 ‘한중합작대학’을 세워 시각전달디자인과 영화학 등 2개 학과 전공학생 300명이 매년 동서대로 와 2년간 공부하고 있어서다.
김희경 인터내셔널 칼리지 학장은 “2019년부터 유학생들만 듣는 경영학, 컴퓨터공학. 영상애니메이션, 게임학과와 각종 융합연계 전공 과목, 전담교수진 및 행정실을 두고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해 외국 학생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동서대학교는 혁신과 특성화, 글로벌화로 학령(學齡) 인구 감소에 따른 위기를 이겨내고 있다.
박주호 한양대 교수(교육학)는 “특성화와 차별화 노력 없이 지역 대학은 생존하기 힘들다”며 “교육부는 지역 사립대학교에 대한 각종 규제와 간섭을 대폭 줄여 지역 대학들이 맘껏 혁신하고 창조·변신하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입학생 모두 ‘右上向’ 삶 살도록...‘진짜 교육’에 전력투구해” -장제국 동서대학교 총장 인터뷰
“동서대학교는 입학 전(before)과 입학 후(after)가 완전히 다른 인재가 되도록 진짜 교육을 시키는 곳입니다. 성적 향상을 넘어 학생 개개인의 가치와 재능, 꿈 실현을 돕고자 합니다.”
장제국(58·張濟國) 총장은 미국 조지워싱턴대 학·석사(정치학)와 시라큐스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 3월 총장에 취임하기 전 동서대 교수와 부총장을 지냈다.
장 총장은 총장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매월 초 학교 홈페이지에 공지하고 있다. 또 인터넷상에서 학생 면담 요청을 받아 수시로 만나는 ‘투명하고 열린 경영’을 하고 있다. 2020년부터 2년간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도 맡았던 그를 지난달 4일 부산에서 만났다.
- 올해 9월 초 개교(開校) 30주년을 맞는 동서대의 비전은?
“그동안 국제화, 정보화, 특성화라는 3대 축(軸)으로 발전해 왔는데 새로운 30년 비전으로 ‘3E’를 추진하고 있다.”
- ‘3E’는 무엇인가?
“Everywhere, Excellence, Engagement 이렇게 3개다. Everywhere는 지구촌 어디에서든 배우고 학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미국 대학에 꼭 가서 공부했지만 이제는 어디서라도 세계 석학의 최고급 강의를 24시간 듣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는 “‘Q 칼리지’라는 규제 프리존을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분야 계획서를 써 내면 국내외에서 마음껏 독립적 연구를 하도록 지원한다”며 “이를 위해 글로벌 체험학습 사이트인 GELS(Global Experiential Learning Site)를 1000개 이상 구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학생이 전공과 연계된 자기주도 경험학습 프로그램을 활용해 기후변화와 북극 환경생태 조사분석 및 연구활동을 하고 싶다면, 이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학교의 GELS@북극 프로그램를 사용하면 된다.”
- Excellence가 지향하는 바는?
“동서대의 4대 특성화 분야인 디자인, 영화영상, 디지털콘텐츠, IT의 실력을 ‘아시아 넘버 원(Asia No 1)’ 수준으로 키우고, 비(非)특성화 학과들도 4개 특성화 분야와의 전략적 연계(連繫)로 수월성을 높이고자 한다.”
장 총장은 “일본어 전공은 디자인이나 영화영상과, 경영학은 IT와 연계해 코딩 기술을 배우고, 컴퓨터는 디자인과 등과 연계해 전공을 심화하면 졸업생들의 취업 기회가 더 넓어지고 장래도 밝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마지막 Engagement에 힘써 동서대가 있는 부산 사회와 호흡하고 부산 사회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는 대학이 되고자 한다. 우리 학교의 임권택 영화예술대학과 디자인대학 등은 부산 시민들의 자랑이자, 자부심(自負心)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달란트 발견, 자기주도적 경험으로 성장토록”
- 전체적으로 학생들의 자발성(自發性), 자기주도(自己主導)를 중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 우리는 기독교적 인성(人性) 위에 ESG 등 환경과 코딩 능력, 외국어 등 4가지 기본 소양을 갖추고 그 위에 ‘3E’를 견고하게 실천하고자 한다. ‘3E’의 목적은 자기 고유의 달란트를 발견해 학생들이 자기주도적 경험을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사회적 인정도 받도록 하는 것이다.”
- 총장으로 12년째 재임 중인데 교육 철학이라면?
“인구 감소 시대에 입학생 한명 한명이 참으로 귀중하고 은혜로운 인생들이라고 확신한다. 이들이 과거의 낙인(烙印)을 떼어 내고 자기가 타고난 잠재력과 가치, 즉 달란트를 발견하고 키워 사회에서 당당하게 한 몫하는 존재로 만드는 ‘진짜 교육’을 하고자 한다. 무(無)에서 유(有)로 학생들을 이끌어내는 ‘교육’에 전력투구(全力投球)하고 있다.”
장 총장은 “솔직히 입학생들 중에 주눅 들어있는 경우가 제법 된다”며 “그러나 동서대 입학을 계기로 이들의 삶이 우상향(右上向)으로 바뀌고,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학생들이 많이 나오도록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 학생 및 학부모들과 활발하게 소통한다고 들었다.
“매년 입학식마다 교수들과 함께 신입생들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洗足式)을 하고 있다. 5월8일 어버이날을 전후해 학부모 간담회를 10년 넘게 열고 있다. 참석하신 학부모들께서 대개 ‘생각보다 좋네’라고 반응하신다. 나는 가족과 학교가 한 마음이 돼 해당 학생의 밝은 미래를 여는 데 힘이 됐으면 한다.”
- 앞으로 각오라면?
“국내 대다수 대학들은 서울대학교의 교과 과정이나 학제를 베끼는데 머물고 있다. 동서대학교는 창의적인 교과 과정과 학제(學制)로 승부하고자 한다. 기존의 틀을 깨고 학생들의 사고방식과 학습에 ‘자유’와 ‘흥미’를 주는 ‘Q칼리지’ ‘X클래스’ 같은 혁신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