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와 영국 글로벌 대학 평가 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공동으로 실시한 ‘2022 아시아 대학 평가’에서 중국 베이징대가 1위를 차지했다. 한국 대학 중에선 카이스트가 8위로 유일하게 ‘톱 10′에 포함됐다. 특히 한국 대학 4개 중 3개(74%)가 지난해에 비해 순위가 떨어져 대학 경쟁력 약화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아시아 대학 평가가 시작된 2009년 이래로 중국 대학이 1위를 한 건 처음이다. 베이징대는 2009년 10위로 시작, 2020년 7위, 지난해 2위에 이어 올해 1위까지 올랐다. 2018년부터 줄곧 1위를 지켰던 싱가포르국립대는 2위로 떨어졌고, 작년 5위였던 중국 칭화대는 3위로 올라섰다. 4위는 홍콩대, 5위는 싱가포르 난양공대, 6위는 중국 저장대와 푸단대, 9위는 말레이시아 말라야대, 10위는 중국 상하이교통대가 차지했다. 중국 대학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톱 10에 5개나 포함됐다.
평가 대상 한국 대학 89개 중 12개(14%)만 순위가 올랐을 뿐, 11개(12%)는 제자리걸음, 66개(74%)는 순위가 떨어졌다. 한국 대학들의 경쟁력 악화는 4~5년 전부터 두드러지고 있다. 100위 이내 대학이 중국은 2019년 23개에서 올해 25개로 늘어난 반면, 한국은 18개에서 16개로 줄었다. 일본도 14개에서 13개로 줄었다.
한국 대학들 순위 하락의 가장 큰 요인은 연구의 양(量)과 질(質)을 평가하는 지표들이다. 교수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연구하는지를 평가하는 ‘교원당 논문 수’ 지표에서 올해 100위 안에 든 한국 대학은 지스트(광주과기원), 디지스트(대구경북과기원), 카이스트, 포스텍, 유니스트(울산과기원), 서울대 등 6개뿐이다. 반면 중국은 해당 분야에서 33개 대학이 100위권에 들었다.
연구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논문당 피인용 수’에서도 한국 대학은 고전 중이다. 한국 대학은 상위 100위 안에 16개가 포함되는 데 그쳤다. 피인용 횟수가 많은 상위 100위 대학 중 절반이 넘는 53개 대학이 중국 학교였다.
이렇게 국내 대학들의 연구 경쟁력이 추락하는 것은 지난 14년간 지속된 등록금 동결 정책 등 정부가 대학을 규제할 뿐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이나 싱가포르가 20년 전부터 대학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판단으로 국가가 나서 대학 투자를 늘려온 것과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학 개혁이 곧 국가 발전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갖고 대학에 투자해 왔고, 특히 과학 기술 분야를 전폭적으로 밀었다. 2016년에는 세계 일류 대학과 학과를 육성한다는 ‘쌍일류’ 정책을 발표하고, 첨단 기술 분야 위주로 대학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이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미국과의 패권 경쟁 속에서 대학 발전이야말로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국가 차원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교해 한국 대학들은 재정 악화로 우수 연구진을 해외 대학이나 기업에 빼앗길 뿐 아니라, 인건비 걱정으로 교수를 제대로 못 뽑는 대학도 많다. QS의 벤 소터(Sowter) 부사장은 “한국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대학이 소수 있지만, 상당수 대학은 연구력과 글로벌 평판도, 국제 다양성을 높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김정호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이공계 분야는 투자하는 만큼 성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직접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언급할 뿐 아니라 실제로 과감하게 대학을 혁신하고 투자해 연구에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면서 “우리는 최근 들어 반도체, AI(인공지능)에 정부 투자를 늘리겠다고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되는 게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과감하고 파격적으로 대학 투자와 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톱10′에서 한국 대학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도 했다.
QS는 한국의 연구·개발 예산이 효율적으로 쓰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QS의 평가 매니저 앤드루 맥팔레인(MacFarlane) 박사는 “한국은 연구·개발비 예산은 세계적 수준인데, 그것이 대학의 필요한 연구비 지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의 대학 연구비 지원이 ‘나눠먹기식’으로 운영되는 점 등을 지적한 것이다. 맥팔레인 박사는 중국에 대해선 “해외 우수 교수진을 공격적으로 유치했고, 코로나로 주춤하긴 했지만 상위권 대학들은 국제화도 훌륭하다”면서 “정부의 전략적 투자로 엄청난 ‘연구 강국’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영찬 한양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국내 대학들이 국제 경쟁력에서 뒤처진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지만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면서 “이런 식으로 대학 개혁을 소홀히 하면 앞으로 국가 경쟁력의 기반이 되는 반도체 등 과학기술 분야에서 더 뒤처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