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인재’를 키울 목적으로 설립된 경기과학고는 2018년부터 ‘의학 계열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학생만 입학시키고 있다. ‘의대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무시하고 의대에 지원하면 장학금과 교육비(500만원)를 환수하고, 학생부에 연구·리더십 활동 같은 영재학교 특별 교육 과정도 기재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올해 대학 지원자 중 24명(18.9%)이 의학 계열(의대·치대·한의대)에 지원했다. 지난해와 같은 규모다.
다른 영재학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본지가 전국 영재학교 8곳 2023학년도 의대 지원 현황을 조사했더니 3학년 821명 중 103명(12.5%)이 의대에 원서를 쓴 것으로 집계됐다. 8명 중 1명꼴이다. 지난해 14.1%보다는 약간 줄었지만 영재고에 부는 의대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학고는 3학년 129명 가운데 41명(31.8%)이 의대에 지원했고, 대전과학고 16명(20.2%), 대구과학고 12명(12.9%) 등도 의대행(行)을 택했다.
영재고는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라 전국에서 학생을 선발하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운영한다. 학비도 무료이고 일반고의 두 배가 넘는 정부 예산 지원을 받는다. 의대 진학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지만, 국가를 이끌어 갈 이공계 인재를 키우기 위한 학교 설립 목적과 어긋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영재고 의대 진학률이 높아 ‘의대 가기 좋은 학교’로 소문이 나다 보니 졸업생 절반 가까이 의대를 지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국가가 영재 육성에 투입한 자원이 고소득 직업을 얻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지적이 나왔고, 교육부가 2016년 영재고 8곳에 의대 진학 제재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2021년 4월엔 8개 영재학교 교장들이 모여 2022년 신입생부터 향후 대학 입시에서 의대에 지원하면 △장학금·교육비 전액 환수 △대입 추천서 제외 △진로·진학 상담을 안 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이를 미리 적용한 서울과학고는 올해부터 의대 원서를 쓴 졸업 예정자들에게 3년 교육비 600만원을 회수하고 있지만, 41명이 의대에 원서를 냈다. 작년 48명보다 조금 줄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대전과학고는 의대 지원자가 지난해 13명에서 올해 18명, 대구과학고는 8명에서 12명으로 늘었다. 교육부 집계 결과 영재고 8곳에서 의대에 진학한 인원은 2020년 57명, 2021년 62명, 지난해 61명으로 매년 비슷한 수준이다.
더구나 일단 이공계 학과로 진학한 뒤 반수(半修)나 재수를 해 의대로 다시 진학하는 경우는 정확히 파악도 안 된다. 2021년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자퇴한 1874명 중 1421명(75.8%)이 이공계 소속이었는데, 입시기관들은 이들 대부분이 의대 입시에 재도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광주과학고(6명→1명)와 세종영재학교(12명→7명)는 줄었고, 작년에 이어 의대 지원자가 한 명도 없는 곳(인천영재·한국과학영재학교)도 있긴 하지만, ‘이공계 영재’들의 의대 사랑을 저지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교육계에서는 500만~600만원 교육비를 돌려받는 대책 정도로 영재고의 의대 열풍을 막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의대 진학 후 얻는 직업 안정성이나 고소득 같은 혜택을 포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정호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학생·학부모가 이공계 분야가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만들어줘야 한다”며 “기업에서는 연구원·엔지니어가 더 오래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문화가 확산돼야 하고, 정부는 집중 육성이 필요한 산업과 관련 학과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