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학기 보고서를 챗GPT로 (작성해서) 냈다. 결과는 A+”
지난 31일 서울대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올라온 글이다. 여기엔 “과연 표절인가? 그렇다면 ‘누구’의 글을 표절한 것인가?”라는 답글이 달렸다.
서강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지난달 7일 “컴퓨터 과제를 하다가 ‘이거 왜 안 되지?’ 궁금할 때 챗GPT에 물어보면 답 잘해준다. 나도 챗GPT가 말해준 대로 코드 수정을 했더니 깔끔해져서 좋았다”는 글이 올라왔다. 학생들은 “진심 놀랍더라”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고 댓글로 호응했다.
고려대 4학년 A씨는 “학교 커뮤니티 ‘고파스’에 ‘챗GPT 사용법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단톡방’에 대한 홍보 글이 올라왔는데, 들어가려고 했더니 벌써 1500명 정원이 꽉 차 있어 아쉬웠다”고 했다.
출시 두 달여 만에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끌고 있는 AI(인공지능) 챗봇 ‘챗GPT’. 미국에서 챗GPT를 활용해 숙제나 시험을 해결하는 학생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대학가에도 ‘챗GPT 대필’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대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사용 경험을 공유하는 글들이 줄줄이 올라오고, 한 국제학교에선 시험에 챗GPT를 활용하다 적발돼 ‘0점’을 받은 사례도 나왔다. 문제는 학생들은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대부분 대학들은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다음 달 신학기 개강을 코앞에 두고 교육계에 비상이 걸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본지가 건국대·경희대·고려대·서울대·성균관대·시립대·연세대·중앙대·한국외국어대·한양대 등 수도권 대학 10곳에 문의한 결과, 10곳 모두 ‘AI 대필’ 등 챗GPT 관련 생길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학 차원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거나 아예 검토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연세대 관계자는 “챗GPT 로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은 알고 있지만, 아직 대학 차원에서 검토 중인 대응책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외대는 “당장 마련된 대책은 없지만, ‘동전의 양면’을 가진 이슈인 만큼 개강 전에 충분히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중앙대 교무처 관계자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고 채점하는 건 모두 교수이기 때문에 챗GPT 관련 대처도 교수 자율”이라며 “현재로는 관련된 별도 가이드라인이나 논의 중인 내용이 없다”고 했다.
본지가 서울대의 전공·교양 수업 중 보고서 평가 비율이 40%가 넘는 과목 30개 강의 계획서를 확인해 본 결과, 표절 금지 경고는 있지만 챗GPT 등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쓰면 안 된다는 지침은 아직 없었다.
실제 챗GPT가 써낸 답안은 벌써 미국 대학교 시험을 통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한 교수가 MBA(경영대학원) 과정 필수 과목 ‘운영관리’ 기말 시험을 GPT에게 치르게 했더니 B 또는 B- 학점을 받을 수준 결과를 내놓았다. 미네소타대 로스쿨 교수들이 챗GPT에게 기말 시험 4과목을 응시하게 했더니 평균 C+ 학점을 받았다. 낮은 성적이지만 통과는 한 것이다. GPT는 대체로 객관식보다는 에세이를 더 잘 썼다고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일부 대학들은 챗GPT가 쓴 글인지를 식별하는 ‘제로GPT’ 프로그램 등을 활용해 챗GPT를 통한 대필이나 표절을 가려내려 하고 있다.
우리도 개별 교수들이 챗GPT 관련 지침을 마련한 경우는 있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다음 1학기 강의 계획서에 “공부하는 과정에서 챗GPT 등 AI를 활용할 수는 있지만, AI를 활용해 생산한 답안을 자신이 쓴 것처럼 제출하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고 공지했다.
무조건 금지하는 것보다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다음 학기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코딩 과제를 할 때 챗GPT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침을 줄 계획이다. 김 교수는 “어차피 기술 발전 흐름을 거스르긴 어렵다”면서 “무리하게 막기보단 이를 잘 활용해 새로운 창의성을 개발해가는 쪽으로 발상을 전환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이제 수업은 미리 촬영한 동영상으로 대체하고, 수업 시간엔 학생들이 직접 과제를 하거나 평가를 보도록 하는 ‘플립러닝(flipped-learning)’ 등 새로운 교수법과 평가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면서 “챗GPT는 AI가 어떤 자료들을 참고해 작성했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모든 과제에 출처를 명확하게 작성하도록 저작권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