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들어옵니다. 비켜주세요.”
지난 10일 오후 대구 동구 혁신도시에 있는 한국사학진흥재단 입구. 5t 트럭 두 대가 들어서자 직원들이 분주해졌다. 붉은 글씨로 ‘CONFIDENTIAL(비밀)’ 마크가 찍힌 노란 상자 수백 개가 트럭에서 내려져 쌓였다. 박스에는 ‘서남대-원서 접수 06′ ‘법인 내부 문서’ ‘장학생 관련’ ‘시험지’ ‘학생 상담’ 등 내용물 설명이 쓰여 있었다.
사학진흥재단은 교육부 산하 기관으로 사학교육기관 경영 개선을 지원하는 곳으로 2012년부터는 폐교 대학들 기록물 관리도 맡고 있다. 교육부가 공식 확인한 폐교 대학은 2000년 이후 20개. 이 대학들이 남긴 기록물은 비(非)전자 기록물 7540상자(7만2372권)와 학생 51만7999명, 교직원 1만6720명 학사·인사 전자 자료(DB)다. 대학이 건네준 자료도 있지만 재단 직원들이 폐교 사무실에서 캐비닛을 열고 모은 것도 상당수다.
지난 10년간 재단은 이 기록물을 보관할 데가 없어 경기도 이천 한 물류 창고에 월 300만원씩 내고 넣어놨다. 그러다 작년 말 44억원을 들여 재단 옆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411㎡ 기록관을 완공하고 기록물을 옮기고 있다. 지난달부터 매주 금요일 이천에서 대구로 기록물을 실어나른다. 이날은 서남대(2018년 폐교)와 동부산대(2020년) 기록물 938상자를 옮겼다. 이 작업은 5월까지 계속된다.
대학 기록물은 공공기록물관리법 등에 따라 최소 하루, 길게는 영구 보관해야 한다. 대학이 문을 닫아도 다니던 학생들 졸업 증명, 성적 등 학사 정보와 교직원 인사 정보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재단을 전담 기관으로 지정해 관리하는 이유다. 이 기록물들은 공공 기록물이자 개인 정보여서 철저하게 관리한다. 기록물 관리 국가 자격을 갖춘 전문 요원 1명 입회 아래 기록관 출입부터 서고에 보존하는 전 과정이 이뤄진다. 수천 상자나 되는 기록물 작업을 전문 요원 1명이 다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재단은 기록물 관리 전문 업체와 용역 계약을 맺고 함께 작업하고 있다. 우남규 대학혁신지원본부 본부장은 “폐교 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한 여성이 미국에 가서 간호사로 취업하는 데 필요하다며 학적 기록을 달라고 하는 등 다양한 기록물 요청이 있다”면서 “이 대학을 다녔던 누군가에겐 소중한 자료라 허투루 관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재단은 현재 인터넷에서 폐교 대학 관련 각종 증명서 발급 서비스도 하고 있다.
폐교 대학 관련 법적 분쟁이 증가하면서 소송 관련 기록물을 찾아달라는 요청도 늘고 있다. 최근엔 폐교 대학에서 일했던 한 교수가 임금 체불 소송을 하는 데 필요하다며 대학에 제출했던 ‘기부금 증서’를 찾아달라고 방문했다. 대학에서 월급을 받은 뒤 다시 기부금으로 내라 해서 증서를 쓰고 냈는데 임금을 못 받은 셈이라 그 증서를 증거로 내겠다는 취지였다.
폐교 기록물은 앞으로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어 재단으로선 고민이다. 이미 폐교한 20곳 기록물만으로도 새로 지은 기록관 82%가 이미 찼다. 변인영 대학구조개선지원센터장은 “앞으로 서남대 크기 대학이 하나만 더 문을 닫아도 기록관이 넘친다”고 말했다. 재단은 내년 기록관을 1층 더 증축하는 예산 16억원을 편성할 계획. 문제는 대학 입학 인구(만 18세)가 올해 44만명에서 2040년 26만명으로 급감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고, 현재 학교 운영이 한계에 부딪힌 대학이 30곳 정도(교육부 추산)에 이르는 상황이라 기록관 포화는 점점 더 심각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실 폐교 기록물 보관 문제는 대학 구조조정 난제(難題)의 작은 단면일 뿐이다. 대학이 폐교하면 ‘미아’ 신세가 되는 학생·교직원만 수천, 수만명에 이르기 때문에 학생들 편입학, 교직원 임금 체불, 남은 재산 청산 등 숙제가 산더미로 쏟아진다. 폐교하는 순간까지 해결 못 하고 질질 끌기 일쑤다. 이를 연착륙하게 하려면 빨리 법을 제정하고 후속 조치에 들어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현 정부는 ‘사립대학 구조개선법’을 통해 대학들의 자발적 통폐합과 구조조정을 유도하고, 한계 대학들은 교육부가 폐쇄하는 등 적극적 역할을 시도하고 있으나, 작년 9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된 뒤 아직 본격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홍덕률 사학진흥재단 이사장은 “준비 없이 갑자기 폐교를 맞이하면 기록물 분실 등 문제도 생기고, 채권·채무 등 재산 관계 정리도 어려워진다”면서 “폐교 문턱에서 시간을 끌기보다 빠르게 폐교를 결정하고 청산 작업에 나서는 게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만큼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