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한 고교 2년생 A군은 작년 7개월간 급우 B군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당하다 못 참고 학교에 신고했다. B군이 A군 신체 특정 부위를 자꾸 건드린 것. 이 역시 ‘학폭(학교폭력)’에 해당한다. “그만하라”고 매번 사정했지만 “장난인데 뭘 그러냐”며 멈추지 않았다. 학폭 신고를 하자 B군과 그 부모는 사과는커녕 곧바로 변호사를 선임한 뒤 A군을 ‘맞학폭’으로 신고했다. “1학년 때 (A군에게) 맞았다”는 주장이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열렸지만 “(성희롱과 맞학폭) 둘 다 입증이 안 된다”면서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낙심한 A군은 전학을 결심하고 학교를 떠났다.
2011년 12월 대구에서 동급생 학폭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중학생 사건이 난 뒤 정부는 2012년 2월 ‘학교 폭력 근절 종합 대책’을 내놓았다. “사소한 괴롭힘도 폭력”이란 인식 아래 매년 학폭 전수 조사를 하고, 가해자 엄벌, 학폭 은폐 학교에 대한 처벌 강화와 함께, 117 학교폭력신고센터 설치, 일진 등 학교 폭력 서클 엄정 대응 등 각종 예방 대책까지 내놨다.
그러나 잠시 주춤하던 학폭은 최근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신체적 폭력에 언어 폭력, 사이버 폭력까지 가세하고, 가해 학생과 그 보호자들이 ‘맞학폭’ 신고로 소송전을 일삼으면서 시시비비를 가려 학생들을 계도해야 할 ‘학폭 재판정’이 어른들이 대리하는 진흙탕 전쟁으로 비화하는 모양새다
◇학폭 피해자 1년 5만명 이상 발생
교육부는 2012년부터 매년 초4부터 고3 학생을 대상으로 학교 폭력 실태 조사를 하고 있다. 학교 폭력을 당했다는 피해 응답률은 2013년 2.2%에서 2014년 1.4%, 2015년 1.0%, 2016년 0.9%로 줄어들다가 2019년 1.6%까지 올라갔다. 코로나로 비(非)대면 수업을 주로 했던 2020년 0.9%로 다시 떨어졌지만 대면 수업을 재개한 2021년에는 다시 1.1%로 올라갔고 2022년에는 1.7%를 기록했다. 1.7%면 5만4000여 명. 매년 ‘학폭’을 당하는 학생이 이 정도 된다는 얘기다.
중고생보다는 초등생들이 학폭 피해에 민감하다. 지난해 실태 조사에서 초등생 중 학폭 피해를 당했다는 비율은 3.8%로, 중학교(0.9%), 고등학교(0.3%)보다 높았다. 한유경 이화여대 학교폭력예방연구소장은 “초등생은 욕설이나 비속어 등에 민감해 학폭으로 쉽게 인식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학폭 행위가 점점 저(低)연령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피해 유형별로는 지난해 조사에서 언어 폭력(41.8%), 신체 폭력(14.6%), 집단 따돌림(13.3%), 사이버 폭력(9.6%) 순으로 많았다. 사이버 폭력은 전년(9.8%)보다 비율이 줄긴 했지만, 수법이 다양화하고 차단이 어렵다는 게 문제다. 최근 익명의 가해 학생들이 중1 여학생 집으로 배달 앱(애플리케이션)을 통해 10건 이상 ‘만나서 결제하기’ 형태로 주문 폭탄을 보내 괴롭힌 경우도 있었다. 최우성 학교폭력예방연구소장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익명 앱 ‘뒷담화’부터 얼굴을 합성하는 딥페이크 등 신(新)사이버 학폭 유형 때문에 학교에서 이를 대처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해 학생 측이 불복 후 법정 공방
작년 6월 서울 한 고교 2학년 D군은 동급생 E군에게 주먹으로 마구 맞았다. 기분나쁘게 쳐다본다는 이유에서였다. D군은 코뼈가 부러지고 잇몸에서 피가 나 전치 4주 진단을 받았다. E군을 학폭 가해자로 신고하자, E군 역시 “나도 맞았다”고 ‘맞학폭’을 주장했다. 학폭위 심의 결과, E군은 7호(학급 교체), D군은 4호(사회봉사)가 나왔다.
피해자인데도 4호 조치가 나오자 D군 부모는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4호 조치는 졸업과 동시에 학생부에서 삭제되지만 그 전 8월에 대입 원서를 넣는 수시 전형에서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정심판 결과 D군은 3호로 내려가 학생부 기록까진 않게 됐다. D군 어머니는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졸지에 학폭위 심의까지 받아 의외 처분이 나와 행정심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지금도 (가해자는)사과도 않고 같은 학교에 버젓이 다니는데 아이가 너무 괴로워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학폭이 발생하면 가벼운 사안은 학교에서 자체 처리한다. 화해를 중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결이 안 되면 지역 교육지원청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로 넘어간다. 위원회 심의 건수는 코로나를 거치며 주춤했다가 다시 증가 추세다. 학폭위 심의 건수는 2020년 8357건에서 2021년 1만5653건으로 늘더니 작년엔 1학기만 9796건으로 1년 전체로 하면 2만건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2019년 이전에는 심의 건수가 연 2만~3만건에 달했는데 학교가 자체 처리할 수 없고 무조건 학폭위를 열어야 했기 때문에 건수가 많았다. 가해자는 대부분 서면 사과(63%)나 접촉 금지(78.5%) 등 가벼운 처분을 받았다. 중징계에 해당하는 학급 교체는 4.2%, 전학 4.5%, 퇴학 0.2% 등이었다. 전문가들은 “10년 전에 비해 ‘일진(폭력 서클)’ 집단 학폭은 다소 줄었지만 초등생 사이 교묘한 학폭, 사이버 폭력, 성폭력 등 새로운 유형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10년 전 정부가 도입한 학폭 대책 중 가장 효과적이라 평가받는 건 학생부에 기록을 남기는 조치다. 학폭위 심의에서 가해자로 판명 나면 1호(서면사과)부터 9호(퇴학) 처분까지 받는데, 4호 이상(3호 이하 조건부 기재)은 학생부에 그 기록이 남는다. 징계 효과는 강력하지만 뜻밖의 부작용도 나타난다. 학생부 기록 때문에 대학 입시에서 불이익을 우려한 학부모들이 행정심판이나 소송을 진행하면서 피해자가 2차 가해를 입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지방 한 초등 6년생 A(12)양은 작년 3월부터 3개월 내내 같은 반 B양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1학년 때부터 친했던 둘은 작년 C양이 전학 오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C와 가깝게 지내는 걸 본 B양이 A양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 A양을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온갖 심부름을 시켰다. A양이 거부하면 “친구라면서 그것도 못해주느냐”면서 압박하고 달래면서 일종의 ‘가스라이팅(심리지배)’을 하기도 했다. A양이 식은땀을 흘리는 등 불안 증세에 위경련까지 일으키자 부모는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 배후에 B양 학폭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A양 부모가 B양을 학폭으로 신고했고, 결국 B양이 1호(서면 사과)·7호(학급교체) 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B양 부모는 사과는 뒤로 하고 변호사를 선임해 행정소송을 진행했다. 소송에서 이겨 7호 조치는 없어지고 1호만 남았다. 이후 두 학생이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A양은 전학 학교를 알아보고 있다.
한국교총에 따르면, 가해자가 행정심판을 청구한 사례는 2017년 518건, 2019년 828건, 2020년 475건, 2021년 682건이었다. 인용률은 15~25% 정도 수준이며, 행정심판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수백·수천만원 변호사 비용을 내고 소송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