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5일 학교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에서 배제하라고 지시한 것은 현재 수능에 학교 수업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항이 다수 출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학원 사교육을 부추기고 과도한 사교육비는 저출산 등 사회 문제로 이어진다는 지적이 따른다. 최근 수능에선 상위권 변별력을 위해 출제된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제)’이 논란이 되고 있다. 국어 문제인데 과학이나 경제 지식을 요구해 수험생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현재 수능은 암기 위주라는 비판을 받은 학력고사를 대신해 대학에서 공부할 사고력을 측정한다는 취지로 1994학년도에 도입됐다. 그런데 30년이 지나면서 사고력 측정이 아니라 지나치게 길고 어려운 지문으로 ‘스피드 테스트’ ‘기계식 문제 풀이’로 변질됐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논란이 된 대표적 ‘킬러 문항’은 지난 2019학년도 수능 국어 31번 문제다. ‘밀도가 균질한 하나의 행성을 구성하는 동심의 구 껍질들이 같은 두께일 때, 하나의 구 껍질이 태양을 당기는 만유인력은 그 구 껍질의 반지름이 클수록 커지겠군’이란 지문이 등장했다. 만유인력과 서양 우주론 등 생소한 개념들이 등장해 응시생 사이에서 “물리 문제냐” “교사도 못 푼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후 수능을 출제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킬러 문항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최근 2~3년간 2019학년도 국어 31번 수준의 킬러 문항은 출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수능 시험 자체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풀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반복적인 문제 풀이를 통해 ‘기술’을 익혀야 고득점을 받는 데 도움이 된다. 일반 학교 수업에서는 수능 문제를 잘 푸는 ‘기술’을 별도로 알려주는 경우가 드물다. 따라서 학원에 가서 모의고사 문제 등을 반복해 접하면서 ‘수능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입시 학원 관계자는 “수능은 문제를 많이 풀어볼수록 유리한 시험”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학교 수업에서 벗어난 내용이 출제되면 학원을 다녀야 하고 이는 결국 부모의 경제력으로 교육의 격차가 대물림된다는 게 대통령 인식”이라면서 “특히 학원을 다녀야만 수능을 잘 치를 수 있는 현재의 제도는 사교육의 ‘이권 카르텔’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확실히 타파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어려운 수능이 학원 의존으로 연결되고, 학원업계의 이권 카르텔로 사교육비가 급증하면 교육 불평등이 더 악화할 것이란 의미다.
윤 대통령은 수능 문제를 ‘통합 교과형’으로 출제한다면서 국어·영어·사회·과학 등 여러 과목을 연계해 난도를 높이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현재 국어 영역은 시나 소설 등 문학 지문 이외에 비(非)문학 지문도 나온다. 비문학 지문에서 과학이나 수학 관련 지문이 나오면 학생들이 어려워하는데 이런 출제 방식을 최소화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국어는 국어답게, 과학과 역사 등도 그 과목 취지에 맞게 수능 문제를 내라는 취지다. 다만 너무 쉬우면 변별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수능이 학생 실력을 판별하지 못하면 재수생이 쏟아질 수도 있다.
학교 수업에서 배우기 힘든 유형의 수능 문제가 많이 출제될수록 학생들은 학원에 의지하게 된다. 지난해 국내 사교육비 규모는 26조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최근 중국의 위와인구연구소는 한국에서 자녀를 만 18세까지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이 1인당 GDP의 7.79배로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고 발표했다. 서울 거주 2030세대의 80% 이상은 자녀를 ‘경제적 부담’이라고 답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급증한 사교육비와 주택 비용 등 때문에 자녀 낳기를 주저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