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윤석열 대통령의 ‘공교육 내 수능 출제’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며 19일 고개를 숙였다. 윤 대통령이 작년 말부터 ‘사교육 경감 대책’의 하나로 학원 도움을 받아야 풀 수 있는 ‘킬러 문항’을 배제하라고 주문했는데 이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정이 ‘사교육 주범’으로 꼽는 수능 ‘킬러 문항’은 정상적 공교육 과정을 따라가서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말한다. 통상 수능 과목당 한두 문항씩 나온다. 2018학년도에 영어 영역이 절대평가로 전환되면서 국어·수학에서 변별력을 갖추기 위해 킬러 문항이 늘어났다. ‘불수능’의 주요 원인이다.
특히 최근엔 국어 영역 비문학에 킬러 문항이 자주 나왔다. 작년 수능 국어 영역에선 동물의 체중과 기초대사량의 관계를 정의한 ‘클라이버 기초대사량’ 연구 결과가 지문으로 나왔다. 2020학년도에는 은행의 자기자본과 위험 가중 재산, BIS(국제결제은행) 비율 공식이 등장하는 문제도 출제됐다. 수험생 사이에선 ‘대학 논문 같다’ ‘국어 영역이 맞느냐’는 불만이 많았다.
이런 ‘킬러 문항’은 학교에선 대비가 어렵기 때문에 사교육 시장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핵심 원인이란 지적이다. 최근 대형 입시 학원들이 집중하는 분야도 ‘킬러 문항’ 대비다. 수능에 나올 법한 문제 유형을 뽑아내 학생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실제 최근 의대 목표 등 최상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서울 강남 A학원은 일찍부터 문제 개발에 나섰다. 학원 수강생에게만 ‘킬러 문항’를 포함한 모의고사를 제공한다고 선전하며 인기를 끌었다. 재수생들에겐 학원비와 별도로 교재비로만 많을 땐 월 100만원씩 받는다. 그런데도 설립 9년 만에 강남의 대표 학원이 됐다. 킬러 문항이 많이 나올수록 입시 학원들이 배를 더 불리는 구조다.
수능 학원들은 입시 강사, 대학원생 등으로부터 킬러 문항을 사기도 한다. A학원은 지난해 수학 영역 ‘킬러 문항’ 공모를 하면서 우수 문항으로 채택되면 한 문제당 75만~200만원, 준킬러·비킬러 문항은 10만~50만원 상금을 지급한다고 했다. 학원가 관계자는 “의대나 서울대를 가려면 과목당 두 문제 이상 틀리면 안 되기 때문에 킬러 하나로 합불(합격·불합격)이 갈린다”며 “학생들이 킬러 문항을 최대한 많이 연습할 수 있는 학원을 선택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A학원이 ‘킬러 문항’으로 성공하자 다른 학원들도 문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킬러 문항’는 재수생도 양산한다. 시험이 어려울수록 재수를 하는 게 유리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재수생은 매년 늘어나 지난해 28%로 역대 최고였다. 재수 학원 비용은 연간 2000만~3000만원에 이를 정도로 가계에 부담이 되지만, 정부의 사교육비 통계에는 잡히지도 않는다.
‘킬러 문항’으로 수능이 어려워지면 학교 수업도 엉망이 된다. 학생들이 학교는 내팽개치고 ‘문제 풀이’만 하는 학원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학교 수업이 아니라 ‘인강’(인터넷 강의)을 들으면서 수능에 대비하는 고교생도 적지 않다. 최진규 충남 서령고 교사는 “의대 가고 싶은데 내신 2등급인 학생들은 아예 수시는 포기하고 수업 시간에 휴대전화로 ‘인강’ 듣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정부는 당장 9월 모의고사부터 이런 ‘킬러 문항’을 배제하기로 했다. 킬러보다는 난도가 낮은 ‘공교육 과정 내 준킬러 문항’을 늘려 전체적 난이도를 맞출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6월 모의고사에서 ‘공교육 내 출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이규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이날 사임했다. 교육부는 “킬러를 내지 않아도 좋은 문항을 개발하면 변별력은 갖출 수 있다”고 밝혔다. 이만기 유웨이교육평가연구소장은 “지나치게 배배 꼬아 만든 킬러 문제를 안 내더라도, 대학들이 학생들을 뽑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수험생들 사이에선 ‘수능이 5개월밖에 남지 않아 혼란스럽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야당은 “대통령의 수능 난이도 관련 발언이 혼란을 부추겼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