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학원 창문에 킬러문제,변형문제 전문이라고 붙어있다./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공교육 과정 내 수능 출제’를 지시하면서 사교육비와 입시 문제 등이 수면 위에 떠올랐다. 학생과 학부모에게 오랫동안 고통을 준 현안들이다. 수능을 5개월 앞두고 공표해 수험생을 당혹스럽게 한 점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정부가 이른 시일 내 방향을 잡아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과도한 사교육비와 입시 등은 저출산·부동산 문제까지 연결되는 만큼 이번 기회에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21일 교육계 원로와 전문가는 말했다. 정부가 올해 수험생 혼란을 줄이는 방법을 조속히 제시하면서 교육 개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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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수능 지침 명확히… ‘공교육 내 출제’ 예시 들어줘야

올해 수능을 5개월 앞둔 수험생들 혼란을 줄이는 것부터 서두를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은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은 킬러 문항은 배제하라”고 지시했고, 6월 모의고사에선 이런 킬러 문항이 나왔다며 교육부 대입 담당 국장을 경질했다. 그런데 “6월 모의고사에서 어떤 문제가 킬러 문항이냐”는 질문에 교육부는 제대로 답을 못하고 있다. 교육부는 “어렵다고 해서 다 킬러 문항은 아니며, 교육 과정을 벗어난 것이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정부가 배제한다는 킬러 문항이 악명 높았던 2019학년도 국어 31번(만유인력 관련) 수준인지 불분명하다. 입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어떤 것이 ‘교육 과정을 벗어난 킬러 문항’인지 정의가 다르다. 이런 틈을 타고 사교육 설명회에선 “킬러보다는 쉬운 준킬러가 늘어나서 더 어려워질 것” “새 유형이 나온다”는 추측들을 쏟아낸다. 학생들은 불안해질 수 있다.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평가연구소장은 “교육부가 과거 수능과 모의고사에서 ‘공교육을 벗어난 킬러 문항’의 예시를 한두 개 들어주면 수험생들이 ‘아, 이런 문제는 출제 안 되겠구나. 나머지는 그대로 공부하면 되는구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정부가 계속 ‘물수능은 아니다’라고만 하지 말고 ‘올해 6월·9월 모의고사를 보고 학생들 수준을 알아봐서 적정 난이도를 유지하겠다. 기존에 공부하던 대로 공부하면 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수능이 변한다고 얘기할수록 수험생은 불안하고, 불안감은 커진다”면서 “정부가 ‘골탕 먹이는 문제는 안 낸다. 하던 대로 공부하면 된다’ 이런 명확한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②“30년 된 수능은 산업사회 유물...서술식, 문제은행식으로”

전문가들은 1994년 도입된 현재 수능은 수명이 다 됐고 새로 설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수능은 변별력을 갖추려고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문제 풀이 기술’이 중요해졌다는 지적이다. 김도연 전 교육부 장관은 “수능은 학생이 100만명이던 시절 한 줄로 세우기 위해 만든 제도로, 새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서술형’ 문제를 차츰 늘려가는 방식을 제안했다.

김우승 전 한양대 총장은 “수능을 ‘문제은행 방식’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AI 등을 활용해 지난 30년간 쌓인 수십만개의 수능과 모의고사, 정답률 등을 분석하면 타당도 높은 문제를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매년 출제진이 합숙하면서 ‘교육 과정 내에서 지난 30년간 한 번도 출제된 적 없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기 위해 고심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배배 꼬인 킬러 문항뿐 아니라 오류 문항까지 나와 수험생들이 소송을 벌이기도 한다. “미국처럼 수능은 자격 시험 정도로 바꾸고 대학이 자율로 뽑게 하자” “프랑스처럼 긴 논술로 사고력을 측정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염재호 태재대학 총장은 “대학도 수능 성적으로 학생을 편하게 뽑으려고 하지 말고, 학생을 면접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성의 있게 뽑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면서 “그러려면 정부도 입시에 대한 대학 자율을 늘려줘야 된다”고 말했다.

③”사교육 이권 카르텔은 심각...90%가 불행하다”

어려운 수능이 사교육 시장을 키우고 이를 통해 이권을 챙기는 ‘사교육 카르텔’은 심각하고 이번 기회에 뿌리 뽑아야 한다는 전문가들도 많다. 염재호 총장은 윤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배제’ 지시에 대해 “상위 10개 대학 가는 소수 강남 학생들을 선별하려고 킬러 문항을 내면 나머지 90% 학생들은 고통을 받는다. 그런 문제 내지 말라는 건 너무 당연한 말”이라면서 “다수 아이들에게 고통 주는 시험 문제를 가르치면서 돈을 벌고 장사하는 문제를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고 밝혔다. 염 총장은 “수능으로 한 줄 세워서 뽑는 게 공정하다고 착각들 하지만, 실상은 사교육 받는 학생들만 좋은 구조”라면서 “어려운 수능, 공교육 약화, 그걸로 돈을 버는 시스템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양인성

배상훈 교수는 “수능 킬러 문항 때문에 하나라도 더 맞히기 위해 사교육에서 훈련을 받고, 학부모들은 쓸데없는 돈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입시에서 사교육의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남 사교육 시장에선 수능 출제위원 경력을 내세워 전국 학원에 문제집을 판매하거나, 출제위원 경력으로 거액의 몸값을 받는 경우도 있다. 특정 지역의 특정 정보를 아는 수험생만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는 ‘불공정 입시’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교육부는 22일부터 사교육의 이권 카르텔, 허위·과장 광고 등 학원 부조리에 대해 2주간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하기로 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21일 “신고된 사안에 대해선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④”부실 공교육이 사교육 내몰아... 공교육 혁명을”

경쟁력 없는 공교육이 사교육으로 학생들을 내모는 것도 사실이다. 사교육을 줄이려면 ‘공교육 혁명’이 필수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우승 전 총장은 “교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교육에 의존하려는 학생들이 계속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20조원 넘게 쌓인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교사들 재교육에 전폭적으로 투자하고 ‘1수업 2교사제’도 해서 학교에서도 학원만큼 잘 가르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양학부 교수는 “2025학년도 도입되는 고교학점제를 잘 안착시키는 게 시작점”이라고 말했다. 현재 중2가 고교에 가는 2025년부터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듣는 고교 학점제가 도입된다. 1학년 때 듣는 공통 과목 이외에 2·3학년 때 듣는 선택 과목은 내신 성적을 절대 평가로 받기 때문에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원하는 과목을 들을 수도 있다. 김 교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을 듣고 교사들이 학생이 공부하는 과정을 시험 문제로 낸다면 사교육으로는 시험 대비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배상훈 교수는 “방과후 학교를 강화해서 학생들이 원하는 여러 가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20~30명씩 공부하는 교실 수업에서 100% 맞춤형 수업이 이뤄지긴 힘들기 때문에, 방과후 수업에서 개인이 원하는 교육 서비스를 해주고 사교육 수요를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수업뿐 아니라, 대입 준비나 진로 교육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배 교수는 말했다. 그는 “학교가 학생부도 꼼꼼히 써주고, 진로 상담도 잘해줘야 사교육에 기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⑤장기 교육 개혁 위한 국가교육위원회 제 역할 해야

교육 개혁은 돌다리 두드리듯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박남기 전 광주교대 총장은 “대통령 직속으로 범정부 사교육 대책위원회를 2년간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사교육비는 입시뿐 아니라 대학·노동 등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교육부만으론 역부족이고, 저출산 대책처럼 다른 부처들도 나서야할 사회적 문제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구체적 메시지보다는 직접 챙긴다는 걸 보여주고, 범부처가 나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다. 김도연 전 교육부 장관은 “이번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을 때 대통령이 장기적 관점에서 공교육 비전 개혁을 제안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사회적 대토론을 진행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현재 국가교육위원회가 장기 교육 개혁을 준비하는 기구인 만큼 이 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도록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왔다.

이범(메가스터디 공동창업자) 교육평론가는 “장기적으로 대학 간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핀란드도 학생들을 시험으로 한 줄 세워 뽑지만 그렇게 경쟁이 심하지 않은 것은 대학 간 격차가 적기 때문”이라면서 “지금 OECD 꼴찌 수준의 대학에 대한 투자를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대학 격차를 줄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에 있지만 명문대인 카이스트, 포스텍 등을 참조해 좋은 학교들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김희삼 교수는 “지금 시스템이면 학생 수가 줄어도 인(in) 서울, 의대 경쟁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대학 들어가는 것 자체를 조금 쉽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예컨대 네덜란드 의대나 인기 대학은 일정 수준 이상 아이들이 지원할 수 있게 하고 추첨해 뽑는다. 그런 식으로 대학 입학의 경쟁 압력을 빼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