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배제’ 지시와 관련해 26일 구체적 예시를 공개하기로 했다. 지난 3년간 수능과 올해 6월 모의고사를 분석해 퇴출 대상인 킬러 문항을 골라내기로 한 것이다. 수능을 5개월 앞둔 수험생들에게 중요한 참고 사항이 될 전망이다.
교육계에선 우선 대학 전공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는 문항들은 빠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문제는 국어에서 과학, 경제 등 다양한 지문을 제시하는 비문학 문제에서 자주 나왔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고통을 주고 사교육 시장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다.
현장 교사들은 2022학년도 국어 13번을 대표적 ‘킬러 문항’으로 꼽는다. 미국의 ‘트리핀 딜레마’에 대한 글을 읽고 답하는 문제다. 트리핀 딜레마는 기축통화인 달러가 국제 경제에서 원활히 유통되도록 많이 풀리면 미국의 적자가 늘어나고, 반대로 미국이 무역 흑자를 보면 돈이 덜 풀려서 국제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역설을 의미하는 용어다. 이 문제에는 트리핀 딜레마뿐 아니라, 브레턴우즈 체제, 금 본위제, 국제 유동성, 닉슨 쇼크 같은 경제 관련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최진규 서령고 교사는 “경제학 전공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풀 수 있는 문제”라며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2023학년도 수능 국어 17번 문제도 수험생들을 괴롭혔다. 과학과 수학의 복잡한 지식이 필요한 지문이 등장했다. 클라이버의 법칙, 절편, 최소 제곱법, 편차 등 여러 개념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어야 풀 수 있다는 분석이다. 1994년 수능 시스템을 설계한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는 “다양한 글을 읽고 독해력을 측정하는 건 현행 수능 취지에 맞지만, 선행 지식이 없어도 읽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며 “관련 지식이 없으면 풀 수 없거나 불리한 문제는 나쁜 문제”라고 했다.
수능 영어 과목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지문이 논란이 됐다. 영어가 모국어인 원어민들도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지적할 정도다. 해외 대학의 전공 서적을 발췌해 한글 번역본을 봐도 무슨 뜻인지 어려운 사례도 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추상적 내용의 지문을 주고 빈칸을 채우는 작년 수능 영어 34번이 대표적이다. 서울의 한 영문과 교수는 “현재 수능 영어 문제는 영어 실력 평가가 아니라 ‘답 찾기 기술’이 중요한 시험”이라고 했다.
최근 6월 모의고사에선 대학 수준의 지식을 요구한 문제는 없었다는 전문가 평가가 많다. 그러나 지나치게 배배 꼬인 문제는 있었다는 지적이다. 입시 업체들은 수학 공통 과목의 22번(함수 문제)을 ‘킬러 문항’으로 꼽았다. EBS가 일부 응시생의 가채점 점수로 분석했더니 정답률이 2.9%에 그쳤다. 교육 과정에서 관련 개념을 다루기는 하지만, 한 문제에 여러 개념이 포함돼 손대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관계자는 “지나치게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데 수능 문제로 출제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킬러 문항’ 수준에 대한 논란은 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교육 과정을 벗어난 수능 문제를 분석해 발표하고 있는데, 2023학년도 수능 수학 영역에선 46문항 중 8문항이 고교 과정을 벗어났다고 봤다. 그러나 교육부와 수능평가원은 “고교 과정 내에서 출제하고 있다”는 입장을 고집해왔다. 한 고교 교사는 “26일 교육부가 발표하는 ‘킬러 문항’ 예시를 보면 올해 수능이 어떤 방향으로 출제될지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