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님!/ 평생 글을 모르니/ 달팽이 껍데기 속에 살듯이 답답했지유/ 이제 고속도로 지나갈 때/ 여주, 논산 무주 간판을 또렷하게 읽어요/ 달팽이가 껍질 밖으로 머리를 내민 것 같다니께요/ 칠십평생 한글 모르고 어째 살았는지 참말로’.

김진순(82)씨는 72살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20살에 결혼을 했고, 40대엔 남편의 병 치료를 위해 충남 논산에서 아무 연고 없는 서울로 상경했다. 17년 동안 경동시장에서 노점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수십 년 서울에 살았지만, 글씨를 읽을 줄 몰라 가본 곳이 많지 않다. 평생 소원은 한글을 배우는 것이었다.

김진순 씨가 쓴 시화 ‘달팽이 껍질 밖으로 나왔시유’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장사를 그만둔 뒤 다니기 시작한 복지관에서 처음 글을 배웠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세 번, 복지관으로 찾아오는 한글 선생님과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고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 늦게 시작한 공부인 탓에 혼자서 글을 쓰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김씨는 ”이젠 TV에서 오늘 어떤 프로그램을 하는지 알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이젠 느린 속도지만 책도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저처럼 이런 바보도 댕겨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지유/ 선생님께 너무 미안해서 얼굴도 못볼 정도여유/ 그래도 선생님이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해유’. 글을 가르쳐준 고마움을 시(詩)에 담아 선생님에게 전했다. 제목은 ‘달팽이 껍질 밖으로 나왔시유’다.

성인 문해교육 학습자들이 한글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 /평생학습이음

김씨가 쓴 글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최한 ‘제12회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최근 문해교육을 받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공모전엔 1만7428명의 참가자가 한글 공부의 즐거움을 담은 시를 지어 냈다. 이번 대회에선 10명이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김씨는 그 중 최고령 수상자다.

박문옥씨의 시화 ‘내가 보네 내가 읽네’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최우수상을 받은 박문옥(68)씨는 ‘내가 보네 내가 읽네’라는 제목의 작품을 냈다. ‘처음에 학교 올 때/ 태평역에서 기흥역까지/ 정거장을 손으로 꼽았습니다/ 안내하는 소리를 못 들을까봐/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왔습니다/ 두 손이 꼭 차고/ 네 손가락을 더하면 내립니다// 이제는 자막에 나오는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진짜 모를 줄 알았는데/ 못 볼 줄 알았는데/ 내가 보네 내가 읽네/ 이렇게 배면 읽을 수 있구나/ 기흥역까지 오면서 울었습니다’

태평역에서 야간 학교가 있는 기흥역까지의 거리는 14정거장. 안내방송이 울릴 때마다 손가락 한 개씩 접어 가며 일년 반 동안 한글을 배웠다. 박씨는 “교회를 40년 다녔는데, 이제서야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니 딴 세상에 온 것 같다”며 “지하철 광고를 읽다 보면 ‘내가 이런 것을 읽는구나’라는 생각에 즐겁다”고 했다.

함옥순 씨의 작품 '내 공부는 내꺼, 니 공부는 니꺼'. /국가평생교육진흥원

‘내 공부는 내꺼, 니 공부는 니꺼’를 쓴 함옥순(66)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장 공장에 다녔다. 스물 한 살에 결혼해 자녀 세 명을 낳았고, ‘내 삶 없이’ 길렀다. 자식 셋 모두 대학에 보냈다. 막내 아들은 서울대 물리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근데 그것도 아들 몫이었죠. 나는 점점 애들한테 필요가 없어지니, 자식 농사 잘 시켰다 해도 대리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함씨는 글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공부를 시작한 뒤에 가슴에 응어리가 없어졌다”며 “이런 행복을 10대에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라고 했다.

‘난 죽을 먹어도 괜찮았다/ 자식들 입에 맛난거 들어가면 배불러지니/ 자식들 공부시켜 박사 만들어/ 박사 모자 내 머리에 씌워줘도/ 그건 내 모자가 아니더라/ 늘그막에 학교 나와/ 돌아서면 잊는 공부지만 내 공부 하고 나니/ 이제야 가슴에 따뜻한 온기 돌며 세상이 보인다/ 공부는 참 신기해/ 대리 만족이 안돼’. 함씨는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공부를 못해 ‘나만 무식하다’라는 설움을 모른다”며 “지금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아무리 아파도 학교를 빠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시화 및 엽서쓰기 수상작은 11월 2일(목)부터 11월 4일(토)까지 양재 aT센터에 전시한다. 국가문해교육센터(www.le.or.kr) ‘온라인 전시관’에서도 수상작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