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동생 집을 찾은 A(54)씨는 초등학교 2학년 조카의 수학 공부를 봐주다 고개를 갸웃했다. 조카가 ‘3 더하기 5′ 같은 초보적 산수도 자꾸 틀리고, 35와 37 사이 어떤 숫자가 와야 하는지 물었더니 대답을 못 했기 때문이다. 시계를 볼 때는 눈금을 하나씩 셌고, 목욕탕 옷장 열쇠에 적힌 숫자를 보고도 옷장 위치를 잘 찾지 못했다고 한다. A씨는 “처음엔 난독(難讀)을 의심했는데, 교육청 검사와 전문 상담을 받아보니 조카가 숫자 세는 것을 어려워하는 ‘난산증(難算症)’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현재 A씨 조카는 서울교육청 지원으로 매주 두 번 60분씩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치료사가 1대1로 도와준다.

난산증은 숫자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산 능력이 떨어지는 일종의 학습 장애다. 문자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난독증처럼 난산증도 지능은 정상 범위에 있지만 수학에 유독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난산증이 있으면 숫자가 연속으로 이어진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4 다음 5가 오고, 그다음 6으로 이어진다는 수 개념이 생기지 않아 단순 계산도 어려워하는 것이다. 국내엔 아직 난산증 연구가 많이 없지만, 해외 사례와 연구를 보면 전체 학령인구의 3~5%가 난산증을 겪는 것으로 추산된다. 난산증 학생 중 약 70%는 난독증을 함께 겪는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난산 증상이 만 6~7세 때부터 나타난다고 본다. 이때가 난산증 치료의 가장 좋은 시기다. 난독과 달리 난산일 때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수학만 좀 느린 것’이라며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수학에 대한 관심을 놓으며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수학 시간에 자신만 풀지 못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거나 친구들 놀림을 받으면 사회성 발달에도 문제가 생긴다. 실제 난산증을 겪는 학생 중엔 교우 관계가 좋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난산 치료는 기초적인 숫자 개념을 반복 학습하고 수와 관련된 어휘와 구문을 익히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서울교육청은 작년부터 이화여대 아동발달센터와 난산증 학생 치료 지원을 전국 처음으로 시작했다. 작년 초등학교 3~6학년 20명을 대상으로 시작해 올해는 초등학교 2~6학년 40명으로 범위를 넓혔다.

A씨 조카는 22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아동발달센터에서 난산증 치료를 받았다. 치료사가 “2씩 건너뛰어 숫자를 세 보자”라고 하자 조카는 고민하더니 2의 배수를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연속한 3개의 숫자를 주고 가운데 숫자를 가린 뒤 맞히는 연습도 했다. 이은주 아동발달센터 연구교수는 “난산증은 문제집을 많이 푼다고 해서 치료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공부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이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차근차근 공부 시간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난산증 치료에는 통상 2년쯤 걸린다고 한다.

그래픽=백형선

자녀가 수학에 특히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연령대별 난산증 징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치원 때 숫자를 잘 세지 못하거나 초등학생인데 수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지 못하면 난산증일 가능성이 있다. 수학만 점수가 낮거나 들쭉날쭉해도 징후가 될 수 있다. 김수정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는 “수학 학습 장애는 원인과 치료법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난산증이 의심되면 교육청 특수교육지원센터에 학습 장애 진단을 의뢰하는 것이 좋다”며 “가정에선 실생활과 관련한 간단한 수학 문제를 풀게 하면서 ‘작은 성공 경험’을 쌓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난산증(難算症)

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산 능력이 떨어지는 수학 학습 장애의 한 형태. 숫자가 연속으로 이어진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기본적인 사칙연산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