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지문이 ‘일타 강사’ 문제집에 포함된 데 이어 같은 시기 제작되던 EBS 수능 교재에도 들어간 것으로 8일 확인됐다. 한 영어 지문이 그해 수능 시험과 유명 강사 문제집, EBS 교재에 동시 등장한 것은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감사원은 한 지문이 3곳에서 일치한 이유와 배경을 감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8일 EBS와 감사원 등에 따르면, 영어 23번 지문은 2022년 9월 나온 일타 강사 모의고사 문제집과 그해 11월 수능 시험, 이듬해 1월 출간을 앞둔 ‘EBS 교재 감수본’에 같이 들어가 있었다. 일타 강사의 문제집 제작과 수능 출제, EBS 감수본 집필은 모두 2022년 하반기 이뤄졌다. 교육계 인사는 이날 “한국에서 출판되지도 않은 미국 교수 책의 일부가 그해 수능과 강사 문제집, EBS 교재에서 일치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했다. EBS 측은 2023년 1월 출간 예정이던 EBS 교재에서 ‘수능 23번’과 같은 지문을 발견하고 최종본에서는 뺐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이날 브리핑에서 수능 영어 지문을 맞힌 일타 강사가 현직 교사 4명과 ‘문항 거래’를 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을 업무 방해와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고 밝혔다. 일타 강사의 돈을 받은 현직 교사 4명은 수능 모의평가 출제나 EBS 교재 집필 경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능 출제 경향과 EBS 교재 제작을 잘 아는 교사들이 사교육업체 유명 강사와 거래를 한 것이다.
EBS 교재는 수능 연계율이 50%에 달한다. EBS 교재에서 수능 문제 절반이 나오는 것이다. EBS는 수능 교재를 출간할 때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의 감수를 받아야 한다. 평가원은 수능 영어 문제도 냈고, EBS 영어 교재도 감수했다. 그런데도 ‘판박이 지문’의 수능 출제를 걸러내지 못한 것이다.
‘수능 영어 23번 지문’이 경찰 수사와 감사원 감사 대상이 된 것은 ‘2022년 하반기’라는 비슷한 시기에 수능과 일타 강사 문제집, EBS 수능 교재 감수본에 약속이나 한 듯 같이 등장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일타 강사 교재뿐 아니라 수능에도 출제되고, EBS 교재에도 있었던 것을 ‘우연의 일치’로 설명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논란의 지문은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쓴 당시 국내 미출간 책의 한 대목이다.
교육부는 8일 브리핑에서 일타 강사 교재에 나온 영어 지문이 2023학년도 수능 영어에 그대로 출제된 사실을 인정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작년 운영한 ‘사교육·카르텔 신고 센터’에 일타 강사가 현직 교사들에게 돈을 주고 문항을 사들였다는 제보가 들어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며 “이 강사가 ‘수능 영어 판박이’ 논란의 문제집을 만들기도 했기 때문에 이 사안도 경찰에 넘겼다”고 했다. ‘수능 23번 지문’과 ‘문항 거래’ 의혹을 함께 수사 의뢰했다는 것이다.
교육부가 해당 일타 강사와 문항 거래를 한 사실을 확인한 현직 교사는 4명이다. 이들은 수능 모의평가 출제나 EBS 수능 교재 집필 등의 경력이 있다. ‘수능 23번 지문’ 논란이 불거진 2023학년도 수능과 모의 평가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그 전에 수능 출제와 관련한 경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사교육을 줄이는 ‘대항마’로 EBS 수능 교재를 강조했다. EBS 교재와 수능을 연계해 수험생이 학원을 안 가도 EBS 교재만 열심히 공부하면 수능 대비가 가능하다고 해왔다. EBS 교재는 교과서와 함께 모든 수험생들이 보는 필수 교재가 됐다. 그렇다 보니 학원이나 일타 강사가 ‘모의고사 문제’를 살 때 EBS 수능 교재를 집필한 경험이 있는 교사들에게 먼저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현재 EBS는 집필진과 계약할 때 ‘(다른) 영리 목적 교재 집필’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지만 실제 참여 여부를 확인하긴 어렵다고 했다. 교육부와 평가원이 EBS 출제진과 사교육업체 간의 ‘커넥션’ 가능성을 방치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수능 영어 23번’ 지문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일타 강사 문제집과 EBS 교재에 같이 들어간 것도 강사와 일선 교사 간 모종의 커넥션 때문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EBS 영어 교재를 쓰는 데 참여한 교사가 일타 강사에게도 같은 문제를 납품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의아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해당 사안은 경찰 수사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수능 영어 23번’과 동일한 지문이 실렸던 EBS 수능 교재는 그해 수능 출제 이전에 만들어졌다. 출제진은 대부분 현직 교사다. 100명 넘는 집필진과 검토진이 교재를 만들면 수능 출제 기관인 평가원이 여러 차례 감수한다. 평가원이 ‘수능 23번’과 같은 지문이 들어갔던 EBS 교재를 감수하고 수능 출제도 주관한 것이다. 감사원은 평가원이 수능일 전에 감수했던 EBS 교재에 실렸던 지문이 그대로 수능에 출제됐는데도 조치를 취하지 않은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EBS 감수본에 등장한 ‘수능 23번 판박이 지문’은 수능 직후 최종 발간된 EBS 교재에서는 빠졌다. EBS 관계자는 “보통 수능에 출제됐던 지문도 변형해서 이듬해 수능 연계 교재에 출제하긴 하는데, 그 문제는 왜 빠진 것인지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EBS 내에서도 “출간되지 않은 수능 연계 교재와 직전 연도 수능 출제 지문이 일치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EBS 교재를 감수하고 수능 출제를 주관한 평가원이 ‘수능 23번’ 논란을 뭉갠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수능 직후 평가원에는 이의신청이 총 663건 들어왔고, 이 가운데 127건(약 20%)이 ‘수능 23번 판박이’에 대한 내용이었다. “일타 강사 문제집을 풀어본 학생이 유리해 불공평하다” “문제 유출을 파악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평가원은 ‘수능 23번’은 아예 심사 대상에서 제외해버렸다. ‘문항 자체엔 오류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교육계에선 “자기들이 감수한 EBS 교재에서 똑같은 문제가 수능에 출제됐고, 그것이 수능 직후 일타 강사 교재에서 나왔다는 문제 지적이 쏟아졌는데도 그 배경을 살펴보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교육부는 ‘수능 23번 판박이’ 논란에 대해 “같은 사안이 재발하지 않도록 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