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 이길여 총장 인터뷰./조선DB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국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가 길어지는 가운데 이길여(92) 가천대 총장이 학생들에게 강의실 복귀를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8일 가천대 홈페이지에 올린 편지에서 “6∙25전쟁 당시 포탄이 날아드는 교실에서도,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는 책을 놓지 않았다”며 “여러분이 강의실로 돌아올 때, 위급 상황에서 절망하고 있는 환자와 국민 모두 작은 희망을 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 출신으로 가천대와 가천대길병원 설립자인 이 총장은 의료계와 교육계의 대표 원로다. 그가 의료 대란 이후 입장을 밝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총장은 이날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는 의사를 키우고 싶어 의대를 설립했고, 그들이 의료계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내 삶에 가장 큰 보람이었다”면서 “지금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편지를 쓰게 됐다”고 했다. 이어 “내가 의사가 되기 위해 끼니를 거르며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했듯, 학생들도 일분일초를 공부에 매진할 때”라면서 “의학도로서 하루빨리 학업에 복귀하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1932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이 총장은 학생들에게 6·25전쟁 속에서도 치열하게 의대 공부를 한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피란지 부산전시연합대학에 전국 의대생들이 모여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했다”면서 “같이 공부하던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나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이 있고, 그들 몫까지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6·25전쟁 당시 포탄이 날아드는 교실에서도,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는 마스크와 장갑을 끼면서까지 책을 놓지 않았다”며 “단체 행동으로 인해 돌아오고 싶어도 오기 힘든 상황이란 것을 이해하지만 학생의 본분은 책을 들고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대 의대, 대면 수업 재개했지만… ‐ 8일 전북 전주시에 있는 전북대 의과대학 1호관의 한 강의실이 텅 비어 있다.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 신청으로 개강을 미뤄 온 전북대 의대는 이날 대면 수업을 재개했지만, 출석한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연합뉴스

이 총장의 학생 사랑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대 졸업생들에겐 졸업 선물로 청진기를 하나씩 선물해준 일화도 유명하다. 환자를 항상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의사 정신’을 잊지 말라는 의미다. 이 총장은 이날 편지에서 “누구나 인생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이 있는데, 나에겐 1998년 가천의대 1회 입학식”이라면서 “그때 만난 학생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했던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여러분을 잘 가르치고 키우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나 같은 의사, 환자를 가슴으로 치료하는 의사, 의사가 천직이라고 믿고 환자를 사랑하며,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의사를 키우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이어 “그래서 당시 불가능에 가까운 의대 설립을 위해 밤낮없이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면서도 “그런데 지금 길을 잃고 고뇌하고 있을 (의대생) 여러분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 총장은 또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배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며 “이번 사태는 정부와 의료계 선배들이 지혜를 모아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것이니, 여러분은 학업이라는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사회의 존경을 받지만, 무거운 사회적 책임 또한 뒤따른다”면서 “(의대생) 여러분은 숭고한 의사의 길을 선택했고, 환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도 감수하는 것이 의사의 숙명”이라고 강조했다.

이 총장은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들에게도 복귀를 호소했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시민을 구하기 위해 고민 없이 불에 뛰어드는 소방대원처럼, 의사는 생명의 갈림길에 있는 환자를 외면해선 안 된다”며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환자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가 나서서 대화를 하자고 하는 만큼, 의사들도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며 “환자의 생명이 달려있는 현실에서, 더 이상 갈등은 환자들의 희생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했다. 의대 증원 필요성에 대해선 “(제가) 의사이기 때문에 직접 말하긴 어렵지만, 한국은 다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선진국과 달리 의료 수요가 높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195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이 총장은 인천에 ‘이길여 산부인과’를 개원해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남성 의사를 꺼려 산부인과를 잘 찾지 않는 여성들을 위해 산부인과를 연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선진 의학을 배워 와 1979년 인천에 ‘길병원’을 설립했다.

이 총장은 “나는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고 정말 치열하게 공부해 의사가 됐지만, 그건 나의 노력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라며 “나는 (희생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의료를 통한 봉사였다”라고 했다.

이 총장은 “학생들이 정상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겠다”고도 했다. 가천대 의대는 1일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이 다른 학생 눈치를 보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강의 동영상도 녹화해 올려주고 동영상을 시청하면 출석 인정도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학생 대부분이 온라인 강의에도 참여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는 “이번 일은 우리의 의료 발전을 위한 의미 있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이 역시 환자의 생명이 전제되어야 하고, 정부와 의료인들이 지혜를 모아 하루빨리 매듭을 짓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