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대 규모 장학 재단인 관정이종환교육재단(관정재단) 이사장으로 고(故)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의 장남 이석준(70) 삼영화학그룹 회장이 지난 2월 선출된 것으로 5일 뒤늦게 확인됐다. 이 전 명예회장은 생전 이 재단 운영을 가족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으나, 별세하기 전 마음을 돌린 것으로 전해졌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2월 이석준 회장을 이사장으로 선출하겠다는 관정재단 이사회 요청을 인가했다. 이 회장은 같은 달 취임해 현재 이사장직을 수행 중이다. 관정재단은 공익 법인으로 서울시교육청에 운영 관련 인허가를 받아야 한다. 관정재단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 전 명예회장 별세 후 재단 승계를 막으려는 일부 관계자와 이석준 회장 간 마찰이 있었다”며 “결국엔 잘 마무리가 됐지만 잘못된 억측이 확산할 것을 고려해 취임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관정재단은 이 전 명예회장이 2000년 6월 설립해 작년 9월 별세하기 전까지 평생 모은 재산 1조7000억원을 기부한 곳이다. 매년 1000명 안팎의 국내외 명문대 재학생에게 150억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지금껏 1만2000명이 넘는 학생에게 2700억원 넘는 장학금이 돌아갔다. 이 전 명예회장은 ‘공수래(空手來), 만수유(滿手有), 공수거(空手去)’라는 말을 스스로 만드는 등 인재 양성을 통해 한국을 과학 강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손에 가득 채운 뒤에 그것을 사회에 돌려주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란 의미다.
이 전 명예회장 별세 후 5개월 뒤에야 장남인 이석준 회장이 관정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는데, 그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명예회장은 90세가 되던 2013년 삼영화학그룹 회장직을 장남 이 회장에게 넘겼다. 그러나 이후 이 전 명예회장이 “삼영화학 경영 실적이 악화했다”며 아들을 비판하는 등 부자 갈등이 있었다.
이 회장은 관정재단 이사장 취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전 명예회장은 2021년 5월 ‘특별 유훈’을 작성했다. ‘유언자 본인의 직계 비속(卑屬)은 관정재단의 임직원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 전 명예회장은 당시 “혈육이 재단 일에 관여하면 재단 설립 목적이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작년 이 전 명예회장의 건강이 악화하고 관정재단 이사회는 재단 운영에 이석준 회장이 관여할 수 있는지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그러나 이 전 명예회장이 별세하기 5일 전 결국 “장남 이석준이 관정재단 이사장으로 운영에 참여하라”는 내용의 유훈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따라 올해 초 이 회장이 관정재단 이사로 취임하고 이어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관정재단 관계자는 “이사회에서도 최종적으로는 이 전 명예회장의 혈육이 책임감을 가지고 재단 운영을 이어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이 전 명예회장 가족이 관정재단 운영에 관여할 수 있도록 이사회가 정관을 수정하는 등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인가한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오는 10일 서울대 관정도서관 관정마루에서 열리는 관정재단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공식 외부 일정을 시작할 예정이다. 관정도서관은 2012년 이 전 명예회장이 서울대 도서관이 낙후했으니 전자도서관을 새로 지으라며 서울대 역사상 최다 기부액인 600억원을 쾌척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