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임재우(26)씨는 지난 3월 남성 스타일링 서비스 업체 ‘알파몬토’를 창업했다. 패션 유튜버 등과 함께 ‘구독료’를 낸 고객을 상대로 직업·나이를 고려해 헤어스타일부터 옷차림까지 컨설팅하는 업체다. 임씨는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적보다 계속 도전하고 부딪치는 ‘기업가’로서 저를 증명하고 싶어 창업을 택했다”며 “창업에 뒤따르는 위험 요소를 감당할 수 있는 최적의 나이인데, 단지 ‘대기업 명함’을 얻으려 취업 전선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하는 ‘Z세대(1995~2004년생)’가 빠르게 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4년제 대학 재학생(작년 졸업자 포함)이 창업한 기업 수는 1951개였다. 2022년(1581개)보다 23.4%(370개) 늘었다. 대학생 창업 기업은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5년(861개) 이래 매년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산업계에서는 “불경기가 이어지며 재작년부터 스타트업 투자 규모가 쪼그라드는 상황에서 이례적 현상”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첨단 하체 운동기구 성능 실험 - 첨단 운동기구 관련 기업‘핏트레이스’를 창업한 중앙대 학생들이 12일 오후 서울 동작구 중앙대 봅스트홀에서 개발 중인 하체 운동 기구의 성능을 시험하고 있다. 지난해 이처럼 대학생이 창업한 기업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박상훈 기자

일각에서는 취업 문이 좁아져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이 창업에 뛰어드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본지가 만난 Z세대 창업자들의 답은 정반대였다. 이들은 “도전할 수 있는 최적기인데 왜 안 하겠느냐” “창업 먼저, 취업은 나중에 하면 된다”고 입을 모았다.

중앙대 생명과학과에 재학 중인 김재성(26)씨는 작년 5월 ‘핏트레이스’를 창업했다. 김씨는 “제가 운동하면서 느낀 기성 제품의 문제점을 해결하자는 데서 아이디어가 떠올라 팀원들을 모아 창업했다”며 “지금이야말로 불확실성에 가장 강하게 도전할 시기라고 생각해 뛰어들었다”고 했다. 김씨의 창업에 동참한 정현석(24·중앙대 전자전기공학과)씨는 “대학 시절 ‘기업가 정신’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게 인생에 굉장한 강점이 될 것 같아 함께 하기로 했다”며 “우리의 ‘린(Lean·군살을 뺀)’함을 살려 대기업은 못 하는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린하다’는 요즘 Z세대 창업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용어라고 한다. 제품 구상부터 수익성 검토까지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는 기업과 달리, 아이디어만 있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제품과 서비스를 일단 시장에 내놓고 실험해 보는 것을 뜻한다.

그래픽=백형선

인공지능(AI) 등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누구도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이들은 왜 창업에 빠졌을까. Z세대 창업자들은 되레 이런 시대적 변화가 창업 욕구를 자극했다고 대답했다. 작년 12월 수전해 스택(물을 분해해 수소를 생산하는 장치) 제조업체 ‘하이드로엑스팬드’를 창업한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과 대학원생 김민규(28)씨는 “미래 에너지 시장이 급변하는 지금이 제 전공을 살려 도전해볼 시기라고 생각했다”며 “수소 에너지 분야 세계 최고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살이라도 젊은 지금 부딪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작년 7월 중앙대 전자전기공학과를 졸업 후 AI를 이용한 동물 이미지 생성 앱을 개발해 ‘언페일’을 창업한 서승우(26)씨는 “대기업 채용전환형 인턴에 합격해 출근을 앞두고 있었지만 고민 끝에 창업을 택했다”며 “AI 등으로 시대가 격변하는 시기에 제 아이템으로 한번 승부를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기회를 포착해 불확실성을 감수한다는 이른바 ‘기업가 정신’에 매료됐다는 이들도 있었다. 본지가 인터뷰한 Z세대 창업자 10명에게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가장 많은 4명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꼽았다. 2명 이상이 꼽은 건 정 회장뿐이었고, 나머지는 삼구아이앤씨 구자관 대표, 타다 창업자 박재욱, 룰루레몬 창업자 칩 윌슨, 토스 이승건 대표 등이라고 답했다.

가천대 산업공학과에 재학 중인 김동현(24)씨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을 남긴 정주영 회장처럼 기업인의 핵심은 좌절하지 않는 것이란 ‘기업가 정신’에 매료돼 창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 4월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인 동갑내기 고도현·이태희씨와 함께 독서 취향을 분석해 이성을 연결해주는 데이팅 앱 ‘북블라’를 창업했다. 지난달 AI를 이용해 사진을 편집하는 서비스 ‘젠티’를 창업한 고려대 산업경영공학부 안재욱씨는 “정주영 회장님은 우리나라 1세대 스타트업 창업가”라며 “끝없이 리스크에 도전하는 그 정신을 존경한다”고 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매년 수도권 소재 대학생을 대상으로 기업가 정신 등을 강연하는 프로그램 ‘EIC’를 운영하는데, 올해 2학기 정원 100명에 362명이 몰렸다고 한다. 김영은 한국경제인협회 팀장은 “몇 년 전만 해도 경쟁률이 1대1 정도였는데 최근 신청자가 크게 늘었다”며 “Z세대가 자기 정체성을 노동자로 국한하는 게 아니라, 창업이나 투자 등을 통해 자본가 역할을 할 것이라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Z세대 창업가가 늘어나는 데는 창업에 뛰어드는 ‘기회비용’이 낮아진 덕도 크다는 얘기가 나온다. 정부와 대학들의 창업 지원 사업으로 이제 더는 창업이 과거처럼 위험한 도전이 아니게 됐다는 것이다. 대학가에서는 “졸업 논문 쓰기보다 창업이 쉽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가천대가 운영 중인 창업 대학 ‘가천코코네스쿨’은 매년 학생 최대 40명을 선발해 한 학기 동안 창업 관련 7과목을 듣는 ‘창업학기제’를 운영하고 있다. 이를 수료한 학생은 ‘창업학부제’ 과정에 들어가 창업 활동을 하면서 학점을 받고 창업 자금으로 최대 1억5000만원까지 지원도 받는다. 덕분에 대학별로 창업 지원을 받아 기업을 만드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대 경영대 창업 지원 조직 ‘벤처 경영 기업가 센터’ 소속 학생이 창업한 기업 수는 작년 42개로 전년(15개) 대비 3배 가까이 늘었다. 카이스트도 작년 학생 창업 기업 수가 116개로 전년(91개) 대비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