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진학이 목표인 고3 수험생 A(18)군은 올해 수시 모집 전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여섯 번의 지원 기회를 모두 의대에 쏟아부었다. 그러곤 광주과학기술원(지스트)에도 추가로 원서를 냈다. 원래라면 의대 불합격에 대비해 6장 중에 하나는 SKY(서울·연세·고려대) 이공 계열 학과에도 썼겠지만, 점수대와 맞는 광주 지역 의대 2곳에 ‘안정 지원’하고 나머진 수도권 의대 4곳에 ‘상향 지원’했다. 과기원은 수시 모집 원서 횟수 제한(6회)에 포함되지 않아 ‘안전 카드’로 추가한 것이다.
‘의대 증원’으로 올해 2025학년도 입시에서 상위권 이공계 학생들이 지원하는 과학기술원 인기가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왔지만, 전국 4곳의 과학기술원(카이스트·유니스트·디지스트·지스트) 수시 지원자 수는 오히려 큰 폭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교육계에 따르면, 올해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수시 전형엔 6500명이 지원해 작년(5986명) 대비 8.6% 증가했다. 디지스트(대구과학기술원)는 전년 대비 17.4% 늘었고, 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원)와 지스트도 각각 13.3%, 14.4% 증가했다. 그동안 과기원들은 수험생들의 이공 계열 선호도 변화에 따라 지원자 수 등락을 반복해왔지만, 4곳 모두 지원자가 대폭 늘어난 것은 이례적이다. 카이스트 등 일부 과기원은 지원자 증가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 혁신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입시 업계는 “의대 증원의 영향이 크다”고 분석한다. 과기원은 교육부가 아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할 대학으로, 수험생들은 과기원 수시 모집에 합격해도 일반대 정시 모집에 다시 지원할 수 있다. 서울 대치동의 한 의대 전문 입시 학원 관계자는 “의대 준비생들은 보통 ‘보험용 카드’로 최상위권 대학 이공 계열 학과 1~2곳을 지원하는데, 올해는 의대 진학 확률이 높아진 만큼 ‘의대만 쓴다’는 학생이 많아졌다”며 “이들이 불합격에 대비해 ‘수시 6회 제한’에 들어가지 않는 과기원을 추가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에 몰릴 것이 예상되면서, 평소 같으면 과기원에 지원하지 않았을 상위권 학생들이 대거 지원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학마다 차이는 있지만 과기원 합격선은 보통 서울 상위권 대학과 비슷한 것으로 평가된다. “과기원에 합격하고도 의대로 가는 학생이 많아질 것으로 보이면서 ‘빈집’을 노린 상향 지원이 늘었다”(강동완 진학지도장학사위원회 위원장)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의대 쏠림 현상’으로 과기원을 중도에 그만두는 학생 수는 점차 늘고 있다. 카이스트의 경우 2019년 76명이던 중도 탈락 학생이 작년엔 130명으로 늘었다. 신입생 정원(830명) 대비 15.7%가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다른 과기원 역시 신입생 모집 정원의 약 15%가 해마다 학교를 관둔다. 카이스트의 한 교수는 “중도 탈락하는 학생 10명 중 9명은 의대에 재도전하는 학생들”이라고 했다.
올해 수시 모집 전형에서 약대 평균 경쟁률도 작년(35.3대1)보다 크게 늘어난 40.7대1을 기록했다. 입시 전문가들은 “최상위권이 의대로 쏠리면서 약대 합격선이 내려갈 것으로 예상돼 상향 지원자가 늘어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올해 서울 상위권 대학 5곳(연세·고려·서강·성균관·한양대)의 반도체학과 등 첨단 분야 계약학과 9곳의 평균 수시 경쟁률이 22.8대1로 작년(20.2대1)보다 소폭 오른 것도 비슷한 이유로 해석된다.
의대 모집 정원 확대로 내년엔 과기원뿐 아니라 최상위권 이공 계열 학과에서 중도 탈락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과기원·첨단 분야 계약학과 등의 지원자 수는 늘었지만, 이공계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