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025학년도부터 사용예정인 한국사 교과서 채택을 앞두고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이른바 ‘진보진영’에서는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9종의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를 소위 ‘뉴라이트 교과서’로 낙인찍고 채택을 저지하기 위한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경북 경산의 문명고등학교 역시 한국학력평가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 중 한 명이 교편을 잡고 있다는 이유로 도매급으로 집중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경북 1호 사학(私學)인 문명고는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7년 불거진 국정교과서 사태 때 유일하게 국정교과서를 채택해 당시도 진보진영의 집중 타깃이 된 바 있다.
이로 인해 이 학교 고3 담임으로 근무 중인 한국사 교과서 집필 교사는 소위 진보언론들의 과도한 문제제기와 교무실로 쏟아지는 전화에 심리적 스트레스는 물론 대학입시를 앞둔 고3 학생들의 진학지도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과거에는 현직 교사로서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불렸는데, 이제는 진영 눈치를 봐야 하는 궁색한 처지가 된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 9월 23일 경북 경산의 문명고에서 만난 홍택정 문명교육재단 이사장은 “교과서 채택률을 낮추기 위한 좌파들의 조직적 압박”이라며 “근거 없는 공격에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舊)한말인 1908년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서 문을 연 ‘문명보통학교’를 뿌리로 하는 문명중·고는 경북 지역에서 최초로 인가받은 유서 깊은 사학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공립학교로 통폐합됐다가 1966년 다시 사립학교인 문명중·고등학교로 부활했다. 1993년에는 청도 운문댐 건설로 학교가 수몰되면서 인근 경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홍택정 이사장은 문명중·고 초대 이사장인 선친 홍영기 이사장 뒤를 이어 2008년부터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 한국사립초중고법인협의회 경북도회장도 겸하고 있는 홍택정 이사장은 현재 ‘역사교육정상화를 위한 시민연대’ 고문으로 교과서 문제에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해당 교사에 대한 공격이 어느 정도인가. "선생님들께 물어보니 교무실로 전화가 엄청 많이 온다. 추석 전에는 한 40대 초반 남성이 교감에게 볼 일이 있다며 학교를 침범한 사건도 있었다. 교문을 통과한 이 남성은 해당 교사 나오라면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갔다. 모 방송국 기자가 진입을 시도했으나 질문요지를 문서로 보내라고 하고 돌려보내기도 했다."
- 현재 해당 교사는 어떤 상황인가. "일단 전화를 안 바꿔주고 차단하고 있다.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 학교 경비 강화 등 방책을 세웠나. "다행히 국정교과서 사태 이후로 정문 경비를 강화했다. 정문 옆으로 펜스도 치고 후문에 출입차단 장치를 설치했다. 국정교과서 사태 때는 민노총, 전교조 등이 학교 정문으로 몰려와서 경찰 기동대가 정문 앞에 상주할 정도였다. 지금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학교 출입자에 대한 신원확인을 강화하고 있다."
-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왜 문제삼는다고 보나. "트집을 잡기 위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가 300여 군데 잘못됐다고 주장하는데, 정확히 어디가 틀렸는지 공개하지 않는다.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가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호도해 채택률을 낮추기 위한 일종의 시장쟁탈전을 위한 노이즈마케팅이라고 본다. 자신들이 미는 특정 교과서 채택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 교과서 시장이 그리 큰가. "교과서는 교과서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가 채택되면 교사지도서부터 학습서까지 5~7권이 줄줄이 따라온다. 고등학생만 해도 130만명에 가깝고, 중학생도 그 정도 된다. 1만권만 팔아도 베스트셀러라는데 130만권이 팔린다면 엄청난 숫자 아닌가. 국정교과서 때도 그랬다. 나라에서 교과서를 만들면 자기들이 미는 시장을 잃게 되니까 결사반대한 것이다."
- 정확히 어떤 점이 문제라는 것인가. "대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 '여순(여수·순천)사건'과 관련해 '반란군'으로 썼다는 것이다. 교과서 본문에는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기술하고 '반란'이란 언급이 없었는데, 사진설명에 '진압군의 반란군 색출 모습'이란 표현이 들어갔다. 일반인들이면 '봉기(蜂起)'라고 하겠지만, 무기를 휴대한 군인이 정부의 정책을 거부하고 상관을 사살한 사건을 '반란'이라고 하지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출판사에서는 항의가 빗발쳐 '반란군'이 아닌 '가담군' '가담자' 등으로 바꾸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들었다."
- 한국사2 표지 삽화에 '연평도 포격전'이 들어간 것도 일부에서는 문제 삼던데.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시키려고 그런 것 아닌가. 우리는 분단 상태로 자나 깨나 북한의 핵(核)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 다 아는 연평도 포격사실을 책 표지에 넣었다고 문제될 것이 뭐가 있나."
- 민족문제연구소는 300여 군데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학력평가원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교과서 내용을 검토해서 적정 여부를 가려낸 교과서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한국사 교과서로 써도 무방하다는 평가를 내린 교과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국가 공인기관이다. 반면 '친일인명사전'을 펴내 재미를 본 민족문제연구소는 뭔가. 쉽게 말하면 그냥 시민단체다. 문제가 있으면 사실에 근거해 지적하고 해명을 듣고 해야 하는데, 한데 뭉쳐서 '친일' '군사독재' '뉴라이트'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일부에서는 교과서 샘플이 나오기도 전부터 문제가 많다는 지적을 해왔다."
실제로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문제삼는 한국학력평가원 한국사 교과서는 ‘뉴라이트 교과서’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와 관련해 비교적 중립적 서술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평가다. 일례로,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인 과로 평가받는 3·15 부정선거와 관련해서는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집권연장을 위하여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과 관련해서는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들은 정국 불안과 사회혼란을 구실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3선 개헌과 관련해서는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빌미로 반대 여론을 억압하였고, 여당은 국회 별관에서 따로 모여 개헌안을 통과시켰다”는 식이다. ‘독도’와 관련해서도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 등 진보진영에서 ‘특별법’ 제정 등으로 성역화한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서술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이후 전개된 민주화 운동의 기반이 되었으며, 필리핀, 타이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세계사적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다.
자연히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되레 “이 정도 교과서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반응도 나온다. 홍택정 이사장 역시 “솔직히 말하면 내 기대수준의 60% 정도”라며 “좌편향 교과서를 바로잡기를 원했지만 이제 우리랑 세대가 바뀌어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 북한과 관련한 서술도 의외로 관대하던데. "국정교과서 폐기 후 나온 지금 교과서를 한번 봐라. 교과서 한 페이지에 걸쳐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문재인이 김정은과 판문점에서 악수하는 큰 사진이 붙었다. 그래서 내가 '정권 홍보용 전단지'라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교과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과연 이것이 국정교과서보다 나은 정상적 교과서라고 할 수 있나. 지금 문제를 삼는 사람들은 왜 그때는 아무런 말도 않고 넘어갔나."
- 문제로 지적된 일부 오타 등은 배포 전 재수정을 거치나. "출판사의 요청이 있거나 출판사와 집필진 사이에 합의가 됐을 때 오타 등의 실수는 당연히 재수정 과정을 거친다. 임의로 고칠 수는 없다. 교육부에도 보고한다."
- 문명고는 어떤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할 예정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 없다. 사학재단 이사장은 교과서 선택 권한이 없다. 현행 사학법에 따르면, 재단 이사장은 학사운영에 일절 개입을 못 한다."
- 그럼 누가 교과서를 선택하나. "담당 교사가 몇 권을 추천하면 교장이 선정하고, 학교운영위원회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는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 대표, 교사 대표 등으로 구성된다. 요즘 사립학교는 교장도 로봇이고, 이사장도 로봇이다."
- 재단 이사장이 건학이념과 교육철학에 부합하는 교과서를 선택할 권한조차 없나. "현행 사학법이 그렇다. 현재 사학재단 이사장은 신규 교사 선발권도 없다. 일례로, 기독교재단 학교에서 이교도 교사를 뽑는 일이 현행 법 아래서는 벌어질 수 있다. 1년에 졸업식과 입학식을 제외하면 학생들 앞에 나설 수 있는 기회도 잘 없다."
- 어떤 교과서가 바람직하다고 보나. "좌파들이 주로 문제 삼는 것은 '친일' '군사독재' '뉴라이트' 이런 것들이다. 친일 문제도 식민지시대 착취 등은 이제 좀 벗어나야 한다. 사실 내가 학교 다닐 때도 일본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 일제 36년 이런 것들만 배우고 일본인들은 훈도시만 차고 다니는 미개인으로 배웠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가? 지정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은 일본이다. 왜 그렇게 많은 한국사람들이 일본으로 몰려 가나? 이제는 대한민국과 일본이 같이 살아가는 공동운명체로 생각해야 한다. 양국이 마음을 합치면 시너지가 대단하다. 우리 학교 학생들도 내년부터 일본에 수학여행을 보내려고 한다. 분명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친일파라고 할 것이다."
- 선택권은 없지만 어떤 교과서가 채택되길 바라나. “국정교과서 사태 이후로 언젠가는 올바른 내용을 기술하는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진실되게 우리 역사에 근거한 교과서가 채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사실 교사들이 교과서 집필진으로 참여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교사로서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 학교 교사가 집필진으로 참여한 교과서가 많이 채택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