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에 대학생을 위한 국가장학금 예산을 올해보다 6000억원 가까이 늘린 5조3000여 억원으로 편성하면서, 이런 혜택에서 소외된 고졸 청년들의 박탈감이 심화하고 있다. 청년층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대학생과 소수인 고졸 청년에 대한 지원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이것이 대학 진학을 더 부추겨 ‘학력 거품’만 키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교육계에 따르면, 대학생 학자금 지원에 견줄 수 있는 교육부의 고졸자 지원 사업은 ‘고교 취업 연계 장려금’ 정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청년에게 500만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중소·중견기업에 취업해야 하고, 1년 이상 근무한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반환해야 하는 등 요건이 까다롭다. 별다른 조건 없이 대학생이면 소득 구간에 따라 전체 대학생의 75%(내년 기준)에게 주는 대학생 학자금 지원과 차이가 크다. 올해 교육부의 고교 취업 연계 장려금 예산은 1214억원이고, 내년 예산도 올해 수준을 유지할 전망이다.
반면 올해 교육부의 대학생 학자금 지원(국가장학금 I·다자녀장학금) 예산은 3조6655억원에 달한다. 예산 규모가 이미 30배 넘게 차이 나는데, 내년부터 혜택을 받는 대학생을 기존 100만명에서 150만명으로 늘리겠다며 수천억원을 더 쏟아붓는다. 대학생들은 국가장학금 외에도 근로 장학금 등 각종 장학금과 등록금·생활비 저리 대출 혜택도 받는다.
교육계에서는 “대학에 안 가면 손해인 사회 구조를 정부가 앞장서서 만드는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작년 한국의 청년층(25~34세) 고등교육 이수율은 69.7%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47.4%)을 훨씬 앞질러 1위를 기록했다.
배영찬 한양대 명예교수는 “비대한 장학금 사업으로 굳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되는 청년까지 유입시키고, 이는 결국 노동시장에서 인력 미스매치를 일으켜 청년 실업을 유발하고 있다”며 “고졸 취업자 지원을 강화해 이 기형적 사회 구조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경기 안산에 사는 김주현(21)씨는 2022년 직업계고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 있는 한 중소기업에서 디자인 업무를 맡고 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고 대학에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취업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뉴스에서 대학생 지원 사업 얘기가 나오면 소외감을 느낀다. 같은 20대 청년임에도 김씨가 국가로부터 받은 지원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교육부에서 주는 취업 연계 장려금은 졸업 후 곧바로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취업이 1년 늦어졌더니 지원 자격이 없다고 하더라”며 “지자체에서 주는 취업 지원금도 서울 회사에 취직했다는 이유로 지원 자격이 안 됐다”고 했다. 그는 “각종 대학생 지원금이 넘친다는데, 저는 한 푼도 못 받다 보니 차별받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고졸 청년만을 타깃으로 한 정부 지원 사업은 대학생 지원 사업에 비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다. 교육부의 ‘고교 취업 연계 장려금’ 정도가 대학생 학자금 지원과 지원 대상 측면에서 유사하다. 직업계고 3학년 또는 일반고 3학년 중 직업교육에 6개월 참여한 이에 한해서 중소·중견기업 취업 시에 500만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업하면 지원이 안 되는 등 여러 조건이 붙었다.
지원 액수도 학자금 지원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대학 학자금을 주는 국가장학금(I유형)은 연간 지원액이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은 등록금 전액, 소득이 낮은 1~3구간은 570만원, 4~6구간은 420만원, 7~8구간은 350만원, 소득이 높은 9구간은 100만원이다. 4년제 대학에 다니면 1~3구간에 해당하는 학생은 총 2280만원을 받는 셈이다. 소득 중간값인 5구간(4인 가구 월 소득인정액 609만원)도 1680만원을 받는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곧장 취업에 뛰어든 고졸 청년 가정의 경제 사정은 대학생 가정보다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지원 액수 차이가 최대 4배가 넘는다.
대학생을 위한 장학금 사업은 이뿐만 아니다. 근로 시간에 따라 학기당 최대 635만원을 받을 수 있는 대학생 근로 장학금 지원도 있다. 정부는 이 사업 예산도 올해 4691억원에서 내년 6358억원으로 늘린다. 이 외에 중소기업 취업 예정자에게 매 학기 200만원씩 장학금을 주는 중소기업 취업 연계 장학금과, 각종 대학생 창업 지원 사업도 많다. 내년에는 대학생들 생활 주거비 부담을 줄이겠다며 월 20만원씩 주는 344억원 규모 주거 안정 장학금도 신설한다.
교육계에서는 대학생과 고졸 청년에 대한 이 같은 차별 지원이 한국을 ‘학벌 사회’로 만드는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1990년 33%였던 한국의 고교 졸업자 대학 진학률은 작년 72.8%까지 올랐다. 반면 싱가포르나 독일·프랑스·영국 등 유럽권 국가의 대학 진학률은 30% 안팎 수준에 머문다. 고등교육 이수가 필수인 직업을 택할 것이 아닌 이상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하는 문화가 정착한 것이다.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던 미국도 최근 대학 인기가 시들하다. 4년제 대학에 가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느니 빨리 기업에서 실무를 익히며 전문성을 기르겠다는 청년들이 많아지며 대학 진학률이 2015년 69.2%에서 2022년 62%까지 떨어졌다. 한 수도권 사립대 총장은 “교육의 질적 향상이 아니라 단순 장학금 퍼주기에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나라는 세계에 없다”며 “대학에는 등록금을 16년째 올리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등록금 수준을 낮게 유지하고, 세금으로 등록금을 지원하며 인기를 챙기는 것 아니냐”고 했다.
투표권이 생긴 고교 졸업자 4명 중 3명꼴로 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정치권이 이들만 공략한 포퓰리즘성 정책을 쏟아낸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내년 학자금 지원을 받는 대학생을 150만명까지 늘리겠다는 공약도 올해 초 총선을 앞두고 정부·여당이 추진한 것이다. 올해 30조원에 달하는 세수 결손이 발생할 전망인데도 청년 지지율을 끌어올리려고 국가장학금 확대를 무리하게 추진한다는 것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19~21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 한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 여론조사에서 18~29세의 6%만이 긍정 평가를 해 전 연령대에서 가장 지지율이 낮았다.
대학생과 달리 상대적으로 수가 적고 정치적으로 응집력도 낮은 고졸 청년들에게는 정치권이 관심을 덜 가진다는 것이다. 신수연 전국특성화고노조 경기지부장은 “대학생에 비하면 고졸 청년을 타깃으로 한 지원 사업은 사실상 거의 없는 수준으로, 주변에 복지를 체감한다는 이가 드물다”며 “직업계고 재학생을 위한 자격증 지원금 예산마저도 올해 삭감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비대해진 대학생 지원 사업을 줄이고, 대신 고졸 취업 청년만을 겨냥한 사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야권에서는 국가장학금에서 소외된 대학 미진학 청년을 위해 고교 졸업 후 수백만원을 자기계발비 명목으로 주는 사업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역시 포퓰리즘이라는 지적과 함께, 청년 지원 사업이 지나치게 대학생에게로 무게추가 기운 상황에서 형평성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특성화고인 김포과학기술고 황영훈 교감은 “졸업 후 중소·중견기업에 취직하는 아이들 상당수가 임금 수준이 많이 낮은데도 정부 지원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보니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종종 있다”며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직업인데도 관습적으로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는 사회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