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서울교육청 강당에서 생애 첫 자서전을 낸 일성여중고 만학도들이 자신의 자서전을 들고 웃고 있다. 왼쪽부터 임양숙(73), 김희현(76), 장민숙(66), 박현숙(68), 강희순(78)씨. /김지호 기자

“지금도 가끔 고향에 가면 몇 안 남은 어르신들이 ‘개똥이 왔느냐’고 해요.”

‘개똥이’ 그녀는 1951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0남매 중 여섯째. 그녀 위로 4명, 아래로 1명이 돌림병 등으로 다섯 살을 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아이를 또 잃을까 봐 무서웠던 어른들은 그녀를 ‘개똥이’라 불렀다. ‘천하게 부르면 명이 길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가서야 자신의 이름, 임양숙(73)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 또래들은 여전히 “개똥아”라며 놀렸고, 임씨는 그게 창피해 화를 내고 싸웠다. 일흔을 넘긴 지금 돌이켜보면 희미한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이다. 임씨는 “개똥이라 불려 일찍 안 죽었고, 그래서 늦은 나이에 학생이 돼 못다 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가 싶다”며 웃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중학교는 못 가게 했다. 중학교는 집에서 8km 떨어져 있었고 다리도 없는 강을 건너야 했다. 자식을 연달아 가슴에 묻은 부모님은 어린 임씨가 학교를 오가다 혹여나 잘못될까 겁이 나 집에 있게 했다. 나물을 캐던 어느 날, 답답한 마음에 도망치듯 서울로 향했다. 이후 남의 집 식모살이, 공장 여공을 했다. 20대 초반, 역시 국민학교만 나온 남편을 만나 아이 둘을 낳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둘을 더 낳았다. 임씨는 “아이 넷을 키우려 남편과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노점상, 꽃 가게, 고깃집 등을 했다. 악착같이 살다가도 이따금 어린 시절 공부를 못다 한 게 생각났다. 하지만 연필을 들 겨를은 없었다.

자식들이 다 크고 가정을 꾸린 후인 2021년, 서울 마포구 일성여중고 문을 두드렸다. ‘아줌마 학교’로도 불리는 일성여중고는 어려운 형편 등 이유로 학업을 다 하지 못한 여성들이 4년 동안 중·고등학생 과정을 마칠 수 있는 학력 인정 학교다. 임씨는 내년 2월이면 드디어 고졸이 된다. 서강대 미래교육원 심리학과 진학을 앞둔 그는 “내가 미술을 좋아하니, 마음이 아픈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는 미술 치료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 교육청에서 열린 '어르신 교육 생애사 출판 기념회'. 일성여자 중고등학교 만학도들이 소감 발표문을 듣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지호 기자

공부를 못해 한 맺혔던 소녀가 이제 자신의 이름으로 자서전까지 냈다. 서울교육청의 만학도 대상 자서전 집필 사업에 일성여중고가 참여하며, 임씨를 비롯한 어르신 53명이 각자 자신의 삶을 꾹꾹 눌러 담았다. 어르신 한 명당 40여 쪽 분량의 책을 8부씩 인쇄해 일성여중고와 서울교육청 등이 1부씩 보관하고 본인에게 5부를 줬다. 임씨는 지난 23일 서울교육청에서 생애 첫 자서전을 받아들고 눈시울을 붉혔다. “힘든 일만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좋은 일도 많았더라고요.”

쓰라린 기억을 더듬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지난 9월 일성여중고 학생 72명이 자서전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옛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며 중단하는 이들도 나와, 19명이 포기했다. 일성여중고 교사들은 “삶을 돌이켜보는 건 값진 일이다. 그간 남을 위해 살았는데 이젠 ‘나’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고 독려했다. 김상현 일성여중고 교무부장은 “중도 포기한 분 중 이번 책자 발간을 보고 ‘나도 계속할걸’ 말하는 분도 있었다”며 “학력 인정 학교에서 이렇게 단체로 만학도 자서전이 나온 건 전국 처음인데,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계속 가지려 한다”고 했다.

지난달 14일 서울 마포구 홍대부속여고 앞에서 최고령 수능 응시자 임태수(83)씨가 파이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희현(76)씨도 이번에 자서전을 통해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경기 이천 출신인 그는 8남매 중 셋째. 어린 시절 가난했다. 배고파 우는 어린 김씨를 보며 한 친척이 “그럴 거면 내다 버려라”고 가족에게 말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국민학교만 마치고 서울로 가 재단사 보조로 일했고, 모은 돈은 집으로 보내며 동생 뒷바라지를 했다. 결혼해 아이 셋을 낳은 후엔 한복을 팔며 자식을 살폈다. 정신없이 남을 챙기고 난 후 한숨 돌릴 때쯤 돼서야 공부를 다시 시작해, 내년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진학을 앞두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자신이 글쓰기에 흥미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김씨가 23일 서울교육청에서 열린 자서전 발간 행사에서 대표로 소감을 밝히며 옛이야기를 풀어내자, 행사장의 280여 일성여중고 만학도들의 눈가가 하나둘 촉촉해졌다.

지난 11월 14일 서울 마포구 홍대부속여고 앞에서 최고령 수능 응시자 임태수(83)씨가 시험장을 나서며 인사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자서전 저자 53명 중 한 명인 2025학년도 수능 최고령 응시자 임태수(83) 할머니는 숙명여대 예비 신입생이다. 백석예술대와 서강대 미래교육원까지 3곳을 나란히 붙었는데, 숙대 미래교육원 사회복지학과 진학으로 마음을 굳혔다. 작년 수능 최고령 응시자인 김정자(83) 할머니도 일성여중고를 거쳐 숙대로 갔으니, 임 할머니가 김 할머니의 중·고등, 대학 후배가 되는 셈이다. 임 할머니는 “건강만 허락해준다면 석사도, 박사도 하고 싶다”고 했다. 만학도가 되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조언도 건넸다. “절대로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주저하지 말고, 걱정하지도 말고, 일단 시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