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6일 동급생의 폭행과 협박을 피해 도주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중경군의 제삿상을 부친 이성근씨가 자택에 차린 모습. 영정 사진 앞에 놓인 햄 반찬은 생전 이군이 가장 좋아했던 아버지의 요리였다./독자 제공

“아들을 살려내라는 말을 피고인에게 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인과관계라는 법리에만 빠져 범죄가 축소되지 않길 희망합니다.”

지난달 28일 대구지법 김천지원. 지난해 아들 이중경(당시 19세)군을 잃은 이성근(45)씨가 재판부를 향해 읍소했다. 이군은 2020년 1월 6일 새벽 경북 구미시 한 노래방 인근에서 또래 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뒤, 자신을 쫓아와 욕설을 내뱉던 A(19)군을 피해 경부고속도로 구미 나들목 지점으로 뛰어가다 교통사고로 숨졌다. 이날 이군과 A군 일행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실수로 던진 생수병 맞자 “오늘 안 되겠네” 돌변

29일 경찰 수사 결과와 검찰의 공소장, 본지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비극은 군 입대를 앞둔 이군과 함께 새해를 맞아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A군에게 전화를 걸어 동석을 권유하면서 시작됐다. 이군과 A군은 친분이 없었지만, 술자리 초반 서로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취기가 오른 이들 4명은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불렀다. 하지만 이군이 실수로 던진 빈 생수병에 머리를 맞은 A군이 갑자기 돌변하며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지난해 1월 6일 경북 구미시 한 노래방 앞에서 A군이 이군을 밀쳐 넘어뜨리고 머리채를 잡고 폭행하는 모습. 이러한 폭행과 협박은 장소를 바꿔가며 약 1시간동안 지속됐다./독자 제공

당시 A군은 이군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뺨을 때렸다. 이군이 즉시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사과했지만, A군은 이군의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수차례 이군 얼굴을 때렸다. 같이 있던 친구 2명이 A군을 제지하며 노래방을 나왔지만, A군은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고 한다.

우연히 인근을 지나던 A군 친구 B(20)군과 C(19)군 등이 다툼을 목격하고 A군에게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자 이군은 더욱 불안해졌다. 다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이군을 A군이 넘어뜨린 뒤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때렸다. 이날 이군은 A군에게 3차례나 무릎을 꿇고 사과했지만 그때마다 A군은 이군의 뺨을 때리거나 박치기를 하는 등 폭행을 이어갔다.

A군이 친구 B군에게 전화를 걸었고, B군이 C군에게 연락하며 폭행 현장엔 A군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방범 카메라에 찍힌 영상에는 이들이 이군 주위를 둘러싸고 위협하는 모습과 이군이 두 손을 비비며 사과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B군은 이군 상의를 잡고 질질 끌고 갔고, A군은 팔로 이군 목을 졸라 뒤로 넘어뜨리기도 했다. C군은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이군을 건널목 바깥쪽으로 수차례 미는 등 폭행을 가했다.

지난해 1월 6일 경북 구미시 한 상점가에서 A군 일행이 이군을 폭행하는 모습. 이군이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구했으나 B군은 이군을 물건처럼 질질 끌었고, A군은 이군의 목을 팔로 졸라 넘어뜨렸다./독자 제공

◇협박하는 가해자 피해 도주하다 교통사고

친구 2명이 이군을 귀가시키기 위해 택시를 잡았지만, 이를 목격한 A군은 택시 뒷좌석에 탑승해 이군을 괴롭혔다. A군은 조수석에 앉아있는 이군에게 “XX놈아, 더 맞아볼래, 여기서 내려라” “내 친구들에게 전화 한 통이면 넌 뒤진다”라며 협박했다. 견디다 못한 이군이 A군을 때리고 그 틈을 이용해 도망갔지만, 뒤따라간 친구가 “이렇게 끝내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으니 좋게 끝내고 집에 가자”고 설득하자 돌아왔다. A군은 돌아온 이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시 도망쳐 나온 이군은 인근 경부고속도로 펜스를 넘어갔다가 지나가던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이군을 따라간 친구가 들었던 이군의 마지막 말은 “너무 힘들다. 더 이상 못 버티겠다. 죽고 싶다”였다.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 법원은 기각

경찰 조사에 따르면 A군은 이군의 사망 소식을 접한 직후 당시 자리에 있던 친구에게 “노래방 갔다가 택시 타고 각자 헤어졌다고 하자”고 하는 등 말을 맞추려던 정황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군의 반격에 맞은 사실은 기억했지만 때린 사실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등 진술의 일관성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미경찰서는 A군이 증거를 없앨 위험이 있다고 보고,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약 1시간에 걸친 폭행과 협박으로 이군이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개연성이 있고, 이에 대해 A군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대구지법 김천지원은 이를 기각했다. A군의 주거가 일정하고 수사에 임하는 태도로 볼 때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지난해 1월 경찰은 A군 등을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대구지검 김천지청에 송치했고, 그해 8월 검찰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폭행) 혐의 등을 적용해 A군 등 3명을 기소했다. A군 등의 폭행이 이군 사망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판단돼 폭행치사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군 부친 이성근씨는 지난달 28일 재판정에서 “인과관계라는 법리에만 빠져 범죄가 축소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검찰, A군 등에게 징역형 구형

아들이 사망한 뒤 이씨는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사건을 알리고 국민청원을 올리는 등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씨가 “제대로 된 처벌을 해달라”며 올린 국민청원에는 4만8200여명이 동의했고, A군 등에 대한 엄벌을 요청하는 진정서만 500장 가까이 대구지검 김천지청에 접수됐다고 한다.

주변 친구들이 기억하는 이군은 성숙하고 남을 헐뜯지 않는 친구였다. 중·고교 시절엔 권투 선수로 활동했고, 지난 2015년 전국복싱대회에서는 금메달을 땄다고 한다. 이군을 가르친 한 교사는 “시합 외엔 힘을 쓰지 않았고 교우 관계가 좋았던 아이”라고 그를 기억했다. 이군은 군대를 일찍 다녀온 뒤 좋아하는 음악 공부를 하겠다던 꿈 많은 청소년이었다. 이군 아버지는 재판정에서 “누군가 한 번이라도 A군에게 주의하라는 신호를 보냈더라면, 지금쯤 제 아들은 군인으로서 국가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검찰은 A군에게 징역 4년 6개월, B(20)군에게 징역 8개월, C(19)군에게 징역 6개월을 구형했다. A군 등에 대한 선고는 오는 6월 2일 대구지법 김천지원에서 열린다.

지난해 1월 6일 경북 구미시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이군이 A군을 피해 도주하는 모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군은 고속도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독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