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그날 처음 써봤는데, 찌르고 나니 주체가 안 됐습니다. 얼마나 찔렀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지난달 25일 대구지법 재판정. 회갈색 수의를 입은 A(23)씨가 고개를 숙인 채 진술했다. 대구 지역 폭력 조직인 ‘대신동파’ 소속 조직원인 그는 지난해 상대 조직 ‘향촌동 구파’를 추종하던 B(20)씨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개인적 원한은 없었다”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자존심 싸움이 칼부림으로
12일 법원 판결문과 본지 취재 등을 종합하면, A씨와 B씨의 ‘악연’은 술집에서의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1월 8일 새벽 3시, 대구 수성구 한 유흥주점에서 B씨 등 일행 6명은 술을 마시다 여성 접객원들을 괴롭히며 소란을 피웠다. 이 주점은 대신동파 조직원 C(28)씨가 운영하던 곳으로, C씨는 접객원들에게 보고받은 뒤, B씨 일행에게 “술값 계산하고 나가라”고 했다.
C씨의 서슬에 질린 B씨 일행은 별다른 저항 없이 가게를 나왔지만, 이후 반발심이 들었다고 한다. 본인들이 추종하는 향촌동 구파가 C씨가 속한 대신동파보다 우위라고 생각한 이들은 “이대로 넘어가면 자존심이 상하니 보복하자”며 뜻을 모았다.
B씨 일행은 보복 대상으로 C씨의 후배 A씨를 점찍었다. 비교적 나이가 많고, 폭력 조직 세계에서도 몇 년 선배인 C씨를 공격할 경우, 조직 간 전면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B씨는 A씨에게 전화를 걸어 “대구에서 대신동이 우리 동네한테 (상대가) 됩니까?” “향촌동 동생들이 불만이 많습니다, 함(한번) 붙어봅시다”라며 시비를 걸었다. 통화 중 B씨 일행 중 한 명은 “느그(너희) 오늘 칼 맞을 준비 해라!”고 외치며 A씨를 위협했다.
A씨는 후배 조직원 3명을 불러 모은 뒤 ‘윗선’ 지시를 기다렸다. 보고를 받은 C씨는 A씨와 통화에서 “현장에 가서 대화해 보고, 안 되면 시원하게 함 해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수사 당국에 따르면 “시원하게 함 해라”라는 말은 이들 조직에서 ‘흉기를 사용하라’는 의미로 통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C씨 지시를 받은 A씨는 흉기를 챙긴 뒤 후배들과 함께 오전 5시쯤 대구 달서구 한 카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연장질했다” 보고에 “씩씩하다”
주차장에서 만난 A씨 일행과 B씨 일행은 서로 대치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말다툼이 이어진 끝에 B씨는 “동생들과 얘기해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죄송하다”라고 말한 뒤, 주먹으로 A씨를 때렸다.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A씨는 즉시 흉기를 꺼내 순식간에 B씨의 배와 옆구리, 무릎, 종아리, 팔 등을 수차례 찔렀다. 당황한 B씨는 저항하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B씨 동료가 A씨를 말리기 위해 다가갔지만 역시 어깨와 옆구리 등을 수차례 찔리면서 맥없이 쓰러졌다. B씨 일행은 야구 방망이 등을 차 트렁크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대치 상황에선 맨주먹뿐이었다.
B씨와 동료는 이 상황을 목격한 주민들의 신고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2개월간 치료가 이어졌지만, B씨는 신장과 동맥 손상 등에 따른 중증 패혈증 증세를 보이며 숨졌다. 치료 과정에선 흉기에 찔린 다리에 괴사가 진행돼 절단해야 했다. B씨 동료는 전치 3주에 달하는 부상을 입었다. 현장을 벗어난 A씨는 선배 C씨를 찾아가 상황을 전했다. “대화가 안 돼서 연장질했습니다” A씨 보고에 대한 C씨의 답변은 “그래, 씩씩하다”였다.
A씨는 얼마 뒤 조직원들과 ‘인증샷’을 찍고 대구 경찰에 자수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 측은 살인에 고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검찰이 “피해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사진을 찍는다는 게 말이 되나. (범행이) 우발적이라고 보기 힘든데 어떤가”라고 질문하자, A씨는 “드릴 말씀이 없지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답변했다.
◇A씨가 보낸 옥중 서신에 C씨 범행 뒤늦게 드러나
사건에 대한 수사 초기에 A씨는 C씨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수사 당국이 향촌동 구파 조직원의 휴대전화에서 A씨가 C씨에게 보낸 옥중 서신을 발견하면서, C씨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C씨가 서신의 사진을 찍어 같은 대신동파 조직원에게 보낸 것이 단서가 됐다. 이 조직원이 향촌동 구파 조직원에게 사진을 다시 전송하면서 수사망에 포착된 것이다. 서신에는 A씨가 C씨에게 “형님 살인 교사, 평생 덮고 아우가 안고 가겠습니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를 토대로 수사 당국은 C씨를 살인 교사 혐의로 기소했다. 지난 1월 22일 대구지법 형사 11부(재판장 김상윤)는 상해 치사 교사 혐의를 적용해 C씨에게 징역 7년 형을 선고했다.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지만 사건이 우발적이었던 점, “시원하게 함 해라”는 말이 상대방을 살해하라는 의미로 보긴 어렵다는 점 등을 감안한 것이었다.
지난달 25일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검찰은 A씨에게 “재판부에 반성문을 낸 것 외에, 피해자 유족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A씨는 “제가 구속된 상태라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면서 “형기를 다 마친 뒤, 용서받는 그날까지 평생 노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날 대구지법 형사12부(재판장 이규철)는 A씨에게 “생명을 침해한 점은 용인할 수 없고, 유족이 겪은 고통은 가늠하기 어렵다”면서도 “자수한 점,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한 점 등을 감안한다”며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배심원 7명 모두 A씨에 대해 유죄 평결했다. A씨는 판결 이틀 만에, C씨는 일주일 만에 항소하면서, 모두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