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부동산중개업소들이 모여있는 성남시 분당구의 한 거리. 뉴스1
전·월세, 주택 매매, 모두 부동산중개인을 통해 합니다. 수십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중개료를 냅니다. 그런데 그런 부동산중개소 사장이 일부러, 혹은 알고서도 ‘전세사기’를 방치했다면 어떤가요? 그들은 어떤 처벌을 받아왔을까요? 생각보다 그들의 책임도, 처벌도 매우 약합니다. 사회 경험이 적을수록, ‘부동산 사장님’만 믿는데 말입니다.

◇”걱정 말라”던 중개사 일 터지자 “나도 몰랐지...”

2018년 8월 대구 서구의 다가구주택에 전셋집을 구한 배모(37)씨. 보증금 1억5000만원의 10%인 1500만원을 주고 계약서를 썼다. 계약전 등기부등본을 보니 8가구가 있는 이 주택엔 금융권 채무 6억원이 설정돼 있었다. 부동산중개인 서모(42)씨는 “시가가 적어도 10억원 정도는 하고, 선순위보증금이 7000만원 정도밖에 안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또 “우리 중개업소는 협회 공제에 2억원이 가입돼 있어서 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잔금 날짜가 다가오면서 배씨는 불길한 낌새를 느꼈다. 전세금 보증보험을 들려는데 집주인 장모(47)씨는 이런저런 핑계로 가입을 방해했다. 배씨는 주민센터를 찾아가 이 다가구주택의 전입세대와 확정일자 내역 등을 확인했다. 다른 세입자들의 선순위보증금 합계가 4억이 넘었다. 시가 10억원짜리 주택에 빚이 10억원이 넘는 상태였다. 그는 “앞이 캄캄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고 말했다.

배씨가 믿었던 건 부동산중개인 서씨였다. “왜 거짓말을 했느냐” 따지며 계약 취소를 요구했더니 서씨는 “집주인이 말하는대로 설명했을 뿐, 채무가 그렇게 많은지는 몰랐다”고 발뺌했다.

◇터지면 “몰랐다” 쏙 빠지는 부동산중개인들

‘전세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부동산중개인이다. 부동산중개업소를 통하지 않고 집주인과 세입자가 직거래하는 경우는 드물다. 부동산중개인은 물건 소개에서부터 계약서 작성, 계약금과 잔금 납입, 입주까지 거래의 전 과정을 돕는다. 때로는 이삿짐센터와 대출까지도 도와준다. 그러나 사기가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슬그머니 빠져버리기 일쑤다.

계약금 1500만원을 떼인 배씨는 집주인 장씨와 부동산중개인 서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둘이 짜고 속였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서씨의 고소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다. 장씨가 말하는대로 물건을 소개했을 뿐 사전에 공모해서 배씨 돈을 가로챈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배씨는 “알고보니 서씨는 자격증도 없는 중개보조인이었고, 정식 중개인은 계약 당일 딱 한번 나타났다”며 “선순위보증금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세입자가 사기당하지 않도록 확인하는 방법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기소돼도 겨우 공인중개사법 위반으로 벌금형?

배씨의 고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피해자만 50여명, 피해금액 35억여원에 이르는 대구 ‘깡통전세’ 사기사건으로 번졌다. 집주인 장씨는 대구에서 다가구주택 13채를 갭투자로 사들였다. 총 매입비 121억원 중 담보대출만 71억원, 월 이자만 2000만원씩을 내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보증금 총 68억원을 거둬들였다. 대출이자는 연체됐고, 나중엔 수도와 전기가 끊기는 집도 있었다. 장씨는 집을 다 팔아도 돌려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새로 전세를 놓고 그 보증금을 가로챘다. 장씨는 2019년 12월과 2020년 4월 두개의 사건 1심 재판에서 각각 징역 3년과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장씨와 함께 기소된 부동산중개인은 모두 4명, 정식 중개업자 2명과 중개보조인 2명이었다. 이들은 공인중개사법 위반으로 기소됐고, 법원에서 70만원에서 300만원까지 벌금형이 각각 선고됐다. 수사 단계에서부터 장씨와 짜고 세입자들을 속여 전세보증금을 날리도록 한 사기 혐의의 공범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중개업자 우모(66)씨는 장씨의 집 전세계약만 30여건을 성사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정해진 중개수수료 요율을 어기고 복비를 더 받은 혐의로만 재판에 넘겨졌고, 그에게는 벌금 300만원이 선고됐다.

서울시 강남구의 한 부동산공인중개사 사무소에 붙여진 아파트 매물 가격표. / 뉴스1

◇”중개인에 선순위보증금 확인 자격 줘야”

전세사기 사건에서 부동산중개인의 법적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법조계에선 “공모 증거를 잡지 않고선 형사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법무법인 로투스 박찬중 변호사는 “집주인과 사전에 공모해 위조된 계약서를 보여주는 등 세입자를 속여 전세금을 가로챘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중개인을 처벌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손해배상 등 민사 소송은 가능하다. 그러나 많이 받아도 피해금액의 40% 정도다. 이마저도 1~2년씩 걸리는 소송을 진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한편 부동산중개인들은 “우리도 피해자”라고 말한다. 사기에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집주인이 저지른 사기 피해액의 일부를 중개인들이 물어줘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부동산중개인은 “최근 판결이 대부분 부동산중개인의 일부 책임을 인정하는 경향이어서 정작 집주인은 돈갚을 여력이 없고, 중개인만 돈을 물어주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인덕 공인중개사협회 상담위원은 “현재 확정일자 여부와 선수금보증금을 파악할 수 있는 ‘임대차정보제공요청’ 제도가 있지만 요청인 자격에 중개인이 빠져 있다”며 “중개인에게 집주인 채무상황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제도적 권한을 줘야 책임있는 중개가 가능하고 전세사기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