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에서 숨진 엄모(31)씨의 유품. 휴대폰 케이스가 불에 그을려 있다./독자 제공

대구경찰청은 지난 11일 고(故) 엄모(32)씨의 유족에게 엄씨의 유품을 전달했다. 케이스 모서리가 불에 그을린 엄씨의 휴대폰과 지갑 등이었다. 엄씨는 지난 9일 대구 수성구 우정법원빌딩 내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방화 사건)으로 숨졌다. 변호사 사무실 직원이었던 엄씨는 사망자 7명 중 가장 어렸고 미혼이었다. 생일을 불과 한달여 앞뒀다.

엄씨의 오빠는 “파산·회생 업무를 맡았던 동생은 퇴근하고서도 의뢰인들을 상담하며 날을 지새웠다”면서 “용의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웠겠지만, 내 동생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엄씨의 빈소엔 언론을 통해 부고를 접한 의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12일 오전 대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선 방화 사건으로 숨진 피해자 5명의 발인이 진행됐다. 원래 이곳엔 숨진 7명 중 방화 용의자인 천모(53)씨를 제외한 피해자 6명의 빈소가 마련됐다. 하루 전 엄씨가 먼저 발인했고 이날 김모(57) 변호사 등 5명의 발인 절차가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유족들은 피해자의 시신을 담은 관이 장례식장 밖으로 나오자 저마다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김 변호사의 아내는 “잠깐 갔다온다 했잖아, 집에 와야지”라며 관을 부여 잡았다. 김 변호사의 시신을 실은 차가 떠나기도 전에 함께 근무했던 사촌 동생 김모(54) 사무장의 관이 나오자 일부 유족들은 주저 앉았다. 관을 두 손으로 치면서 “어떻게 한날 한시에 사촌들이 이렇게 떠나냐”며 울기도 했다.

12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우정법원빌딩 앞에 붙은 시민의 편지/이승규 기자

◇”신이 원망스럽다”...시민들 연일 현장 찾아 추모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날 방화 사건이 발생했던 우정법원빌딩 1층 출입구엔 국화 등 꽃과 꽃다발 5개가 놓여져 있었다. 출입구 쪽 창문에 붙은 쪽지에는 손글씨로 “뉴스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파 국화와 소주 한잔을 놓고 갑니다”라면서 “신(神)이라는 단어가 원망스러운 일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출입구 안쪽에는 시민이 문틈을 통해 넣어둔 것으로 보이는 5만원권 지폐도 있었다.

지난 11일에도 익명의 시민이 출입구 쪽에 5만원과 편지를 넣어둔 봉투를 놓고 갔다. 이 시민은 편지에서 피해자들에게 “죄 없는 당신들이 피해자가 됐다”고 썼고, 용의자인 천씨에겐 “누구보다 괴로워 귀한 목숨 버린 당신, 당신과 다른 누군가의 가족 가슴에 이렇게 못을 박습니까”라고 썼다.

천씨는 재개발 아파트 투자금 반환 소송에서 패소한 데 대한 불만으로 지난 9일 우정법원빌딩 203호실에 침입해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천씨가 방화한 이 사무실 소속 배모(72) 변호사는 지난 2016년 천씨가 사업 대행 업체를 상대로 재개발 아파트 투자금 반환 소송을 제기해 일부 승소했을 당시 업체 측 변호인이었다.

그러나 재판 결과에도 업체가 천씨에게 돈을 주지 않자 천씨는 업체 대표인 A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지난해 6월 패소했다. 이 재판에서 배 변호사는 A씨의 변호를 맡았고 오는 16일로 예정된 항소심 변론도 담당했다. 범행 전날 천씨는 A씨에 대한 명예 훼손 등 혐의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천씨는 범행 당일 오전 10시에도 이 사업과 관련된 부동산신탁 주식회사를 상대로 건 6억원 상당의 추심금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천씨는 이 재판 이후 불과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범행을 저질렀다. 잇따른 패소로 거액의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불만이 천씨의 방화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범행 당시 배 변호사는 출장 중이라 화를 면했고, 천씨 소송과 관련없는 김 변호사와 엄씨 등 6명이 숨졌다.

12일 대구 중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변호사 사무실 방화사건 희생자들의 발인식에서 유족과 지인들이 희생자들의 관을 운구하고 있다./연합뉴스

대구경찰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1차 소견에 따르면 사망자 7명 모두 직접적 사인(死因)은 일산화탄소중독으로 추정된다”면서 “최종 사망 원인은 1달 내 국과수 최종 감정을 통해 확인할 예정이며, 용의자의 휘발유 구입처 등을 수사할 방침”이라고 했다. 대구지방변호사회는 오는 13일 오후 6시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합동추도식을 열어 피해자 6명을 추모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