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 194명이 타고 있던 제주발 대구행 아시아나 여객기가 운항 도중 한 승객이 비상문을 열어 비상착륙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상문이 열리는 순간 기내에선 비명이 터져 나오고 일부 승객은 호흡곤란 증세로 쓰러지기도 했다. 여객기가 완전히 정지할 때까지 약 8분 동안 승객들은 공포의 시간을 보냈다.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26일 오전 제주에서 대구로 향하던 아시아나 항공기에서 30대 남성이 착륙 전 대구공항 상공에서 비상문을 강제개방하는 사고가 발생해 일부 승객이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 어명소 국토교통부 제2차관 등 관계자들이 이날 오후 대구공항을 찾아 비상문이 개방된 채 계류장에 대기중인 항공기에 올라 현장을 확인하고 있다. /뉴스1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26일 오후 12시 42분쯤 아시아나항공 OZ8124편(A321 기종) 여객기 내에서 왼쪽 큰 날개 바로 뒤 비상문 옆에 앉아 있던 승객 A(33·무직)씨가 갑자기 비상문 레버를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대구공항에 착륙하기 3분 전이었고, 상공 250m 지점이었다. 문이 열리자 강한 바람이 들어왔고,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탑승객 이모(38)씨는 본지 통화에서 “도착 안내 방송이 나간 지 얼마 안 돼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중간에 위치한 비상구 문이 열렸다. 순간 대형 선풍기를 튼 것처럼 강한 바람과 함께 비행기가 ‘훅’ 하고 수십 미터 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여객기는 12시 45분쯤 활주로에 착륙했고, 12시 50분쯤 완전히 정지했다. 이날 사고로 총 12명이 호흡곤란과 손 떨림 증세를 보였다. 착륙하자마자 증세가 심한 9명은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고, 경미한 3명은 귀가했다.

이날 사고는 비상문 옆에 앉아 있던 A씨가 비상문 레버를 강제로 당기면서 발생했다. 이미 도착 안내 방송이 나간 뒤였기 때문에 승무원 4명은 모두 지정된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가운데 통로가 있고 좌우로 좌석이 3개씩 있는데, A씨는 왼쪽 비상문 옆 좌석에, 승무원은 오른쪽 끝에 앉아 있었다”며 “비상문을 열 수 있는 레버는 문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고, 힘을 주고 당겨야 문이 열리는 구조”라고 말했다.

대구 동부경찰서는 여객기 착륙 직후 A씨를 긴급 체포했다. A씨는 키 180㎝에 몸무게 100㎏ 가량 되는 거구(巨軀)인 데다 당시 심리적 불안 증세로 혼자 걷지를 못해 경찰 5~6명이 들어서 경찰차로 옮겼다고 한다. A씨는 경찰에서 “비상문 고리를 잡아당겼다”고는 진술했으나, 범행 동기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안전벨트를 매고 앉은 상태에서 비상문 레버를 당긴 것으로 조사됐다. 제주 출신인 A씨는 동행인 없이 혼자 비행기에 탑승했고, 범행 당시 음주 상태이거나 마약 양성 반응은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A씨를 항공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으며, 현재는 불안 증세를 호소해 조사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달려온 A씨 어머니는 “줄곧 대구에 있던 A씨가 1년 전쯤 제주도에 가서 여자친구와 함께 살았는데, 최근 이별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고 당시 여객기 안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여객기에 탑승했던 문모(46)씨는 본지 통화에서 “착륙 안내 방송이 나가고 2~3분 후에 갑자기 항공기 내부의 공기가 밖으로 빨려나가서 비행기가 폭발하는 줄 알았다”며 “문이 열리자 종이가 날아다니고, 강한 바람 영향으로 몸에 강한 압박을 받으면서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고 했다. 이어 그는 “착륙 후 비상구 쪽을 보니 비상구를 연 것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을 승무원과 승객 여러 명이 붙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승객 이모씨는 “승무원들이 다급하게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라’고 소리쳤고, 승객들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며 “한 승객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승무원이 다급하게 승객 중에 의료진이 있는지를 물었고, 승객과 승무원들이 응급조치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7일 울산에서 열리는 전국소년체전에 참가하는 제주 초·중등 육상 선수 38명도 탑승 중이었다. 초등학생 3명과 중학생 5명, 코치 1명 등 9명이 심한 호흡곤란과 어지러움, 불안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겨졌다. 학생들을 인솔한 제주도육상연맹 관계자는 “아이들이 놀라서 몸을 벌벌 떨며 울고 소리치고 있었다”며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많이 놀랐을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다행히 학생들은 오후 4시 30분쯤 안정을 되찾아 퇴원해 울산으로 이동했지만, 학생들이 “돌아갈 때 비행기를 못 타겠다”며 불안을 호소해 선수단 전원이 심리 치료를 받았다.

비상문이 열린 채 활주로에 도착한 여객기 모습은 사고 당시의 긴박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열려 있는 비상문 경첩은 엿가락처럼 휘어 있었고, 비상문이 열리면 자동으로 펼쳐치는 비상 탈출용 슬라이드가 바람에 찢겨 날아가 있었다. 비상 탈출용 슬라이드는 에어백처럼 비상문이 열리면 자동으로 미끄럼틀처럼 펼쳐지도록 돼 있다.

다만 기내 천장에서 떨어지는 산소마스크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시아나항공 측은 “산소마스크는 여객기 안과 밖의 기압 차로 인해 승객들의 호흡이 곤란한 상황이 되면 자동으로 내려오게 돼 있는데, 이날 사고는 기압 차가 크지 않은 높이에서 벌어져 마스크가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