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부터 17일 오후까지 이어진 폭우로 곳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한 경북 예천군 현장은 모두 정부가 별도 관리하는 ‘산사태 취약 지역’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예천에선 산사태로만 주민 7명이 숨지고 4명이 실종됐다.
산사태 취약 지역은 2011년 서울 우면산 산사태 이후, 산림보호법에 따라 집중호우와 태풍으로 인한 산사태를 막아 국민의 생명과 재산,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 지역을 정해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지정을 위해서는 산림청이 기초 조사를 하고, 관할 지방지치단체가 현장 실태 조사를 한 뒤 전문가들이 검증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 결과 위험도를 네 등급으로 분류해 산사태 위험이 높다고 판단한 상위 1∼2등급인 지역을 지자체장이 취약지역으로 지정·고시해 집중 관리하도록 돼 있다.
이번 예천 산사태 때는 취약 지역으로 지정되지도 않은 곳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예천에서 산사태가 발생한 곳은 감천면 진평리와 벌방1리, 용문면 사부리, 효자면 백석리 등 4곳. 이중 가장 피해가 큰 곳은 효자면 백석리다. 마을이 통째로 떠내려갔다. 17일 오후까지 4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다. 지도를 보면, 백석리에서 1~5km 거리에 지정된 ‘산사태 취약 지역’만 20곳에 달했다. 이 중 7곳은 2020년 이후 지정됐다. 대피소는 백석경로당, 예천곤충연구소 등이었다.
주변 대부분이 취약 지역인데 사고가 난 백석리만 빠져있는 모습이다. 백석리는 흰돌마을 등 네 곳으로 나뉘어 63가구, 123명이 살고 있다. 반면 군(郡)이 지정한 취약 지구는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 계곡 주변이거나 백석리보다 낮은 곳이다. 백석리 주민 김정숙(72)씨는 “산사태 취약 지역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평생 이런 산사태를 구경 한번 한 적 없었으니 아무런 대비도 못 하고 당한 것”이라고 했다.
산사태로 1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된 감천면 진평리도 지난 2019년 10월 취약 지역으로 지정된 곳과 불과 600여m 떨어져 있고, 대피소는 벌방리 노인복지회관으로 지정돼 있었다. 흙더미에 주택이 매몰돼 2명이 숨진 용문면 사부리는 2021~2022년 지정된 취약 지역 2곳이 직선거리로 700~800m 남짓 떨어져 있었다.
예천군이 지정·관리 중인 산사태 취약 지역은 모두 66곳이다.
예천군의 ‘해빙기 취약 시설 안전 점검 추진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예천군은 지난 2~4월까지 산림조합과 함께 산사태 취약 지역을 전수조사했다. 공무원 2명과 시민 단체 관계자 등 총 4명이 47일 동안 취약 지역으로 지정된 66곳을 둘러봤다고 돼 있다.
그 결과 모두 ‘이상 없음’이라고 결론 냈다. 산사태 정보 시스템과 비상 연락망도 ‘이상 없음’이었다. 다만 산사태 우려 지역 2곳을 추가해 경북도에 내년 사방 사업 대상지로 건의했다. 경북도 관계자는 “예천 산사태를 보면 취약 지역 지정 기준 등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게 드러난 셈”이라며 “취약 지구 지정 및 관리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해동 계명대 지구환경학과 교수는 “1998년 지리산 폭우 이후 우리나라 강우 패턴이 바뀌었다. 더 이상 기후 위기의 안전 지대가 아니다”라며 “산사태를 막으려면 전원주택이나 펜션 같은 무분별한 개발 시설이나 태양광 설치 등을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달 7일부터 17일까지 전국에서 총 170건 하천 제방 유실이 발생했다. 충남 127건, 충북 20건, 경북 13건, 전북 7건, 대전 2건, 세종 1건이었다.
둑·댐·교량 등 국가 기반 시설은 100년 만에 한 번 나타날 강수량(극한 강수량)에 맞춰 건설하는데, 기상 이변이 자주 나타나는 만큼 기준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극한 강수량은 187.1~318.4㎜이지만 오는 2040년까지 비가 하루 최고 492.7㎜, 2060년까지는 653.2㎜ 내릴 수 있다고 전망된다. 정부 관계자는 “극한 호우 현상은 해마다 심해질 것”이라며 “과거 강수량에 맞춘 방재 기준을 대폭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