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8일 오전 6시 20분쯤 대구 북구의 한 편도 4차선 도로. 승용차로 2차로를 달리던 A(26)씨는 순간 오른쪽에서 검은색 물체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탁’ 하는 충격이 느껴졌다. 검은색 옷을 입고 무단횡단을 하던 보행자가 A씨 차량의 오른쪽 사이드미러에 부딪혀 쓰러진 것이다. 곧이어 뒤따라오던 B(57)씨의 차량이 쓰러진 보행자 C(79)씨를 치고 지나갔다. C씨는 흉곽(가슴)골절로 현장에서 숨졌다. 검찰은 운전자들을 조사해 재판에 넘겼지만, 법원은 이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밤 이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구지법 형사11단독 김미란 판사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와 B씨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고 18일 밝혔다. 앞서 검찰은 “야간에 횡단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었던만큼, (A씨와 B씨가) 사고를 미리 막아야 했다”면서 “전방 주의 의무를 게을리 한 것”이라며 기소했다.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보행자 C씨의 교통사고는 A씨와 B씨가 미리 대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벌어졌다고 본 것이다.
◇ 어두운 시각, 어두운 옷 입고 무단횡단
법원이 A씨 등을 무죄로 판단하기 전 고려한 핵심 쟁점은 사고 발생 시각과 C씨에 대한 인지 여부였다. 사고 당일 해가 뜨는 시각은 오전 7시로, 사고는 이보다 40분 전에 발생했다. 사고 지점 인근에 가로등이 설치돼 있었지만 불빛이 가로수에 의해 가려졌다. 증거로 제출된 A씨와 B씨 차량의 블랙박스에서도 사고 지점 인근이 매우 어두웠던 점이 확인됐다.
피해자 C씨가 당시 입었던 옷 색깔이 상·하의 모두 검정색 및 짙은 회색이었던 점 역시, A씨가 C씨를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김 판사는 “사고 지점 인근에 주거지와 근린시설이 없어 보행자 통행량이 매우 적었고, 사고 지점 불과 50m 앞에 횡단보도가 있었다”면서 “어두운 지점에서 어두운 복색을 갖춘 피해자의 상태, 도로 주변 환경 등을 감안하면 A씨가 무단 횡단을 하는 보행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 법원 “예견 어려운 사태까지 대비할 의무 없어”
B씨에 대해서도 법원은 같은 판단을 내렸다. A씨의 차량은 사고 직후 1~2차로에 걸쳐 정차 중이었고, B씨는 A씨 차량 뒤편 3차로로 주행하다 C씨를 쳤다. 그러나 어두운 환경 속에서 B씨 역시 C씨를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법원은 판단했다. 김 판사는 “B씨의 블랙박스에서 충돌 2초 전에야 C씨의 형체가 확인되는 만큼, 사람의 시각으로 본 모습은 더욱 불분명했을 것”이라며 “B씨가 1~2차로에 정차한 A씨 차량을 봤더라도, 1~2차로가 아닌 3차로에 피해자가 있을 것이라는 점까지 예단해 피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편도 4차선 중 4차로엔 불법 주차 차량들로 인해 B씨가 피하기 어려웠던 점, A씨와 B씨 모두 도로의 제한 속도보다 낮은 속도로 운행했던 점 등도 유리한 정황으로 고려됐다.
김 판사는 “판례상 예견하기 어려운 사태까지 운전자가 대비해야 할 주의 의무가 있다고 볼 순 없다”면서 “치사 혐의를 적용할 만큼 A씨 등의 과실과 C씨의 사망 사이의 인과 관계가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