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총 전국택배노조가 지난달 서울 종로구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열린 우체국택배 노사 단체교섭 결렬 및 투쟁 돌입 선포 기자회견 도중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노동조합법에 따른 회계 장부 공개 요구를 양대노총을 비롯한 주요 대형 노조가 대거 거부한 가운데, 민노총 산하 전국택배노조 최고위 간부가 노조 계좌를 자신의 사(私)금고처럼 활용한 정황이 확인됐다. 일반 시민 등으로부터 소위 ‘후원금’ ‘투쟁기금’ 등을 후원받던 계좌를, 자신의 개인 조의금 수취 계좌로 쓴 것이다. 회계 전문가들은 “단순한 표기 실수가 아니라면, 노조 돈과 개인 돈을 섞어놓고 마음대로 썼다는 얘기”라고 했다.

26일 조선닷컴 취재를 종합하면, 택배노조는 2020년 10월4일 페이스북 등을 통해 노조 명의의 부고(訃告)를 냈다. 택배노조 설립의 주도자이자 당시 택배노조 수석부위원장(현재 위원장)이었던 A씨 모친상을 알리는 부고였다. 이 부고 알림장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가급적 조문을 삼가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부의금 계좌가 적혔는데, 이 계좌의 명의자는 A씨가 아니라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이었다.

2020년 10월 택배노조 수석부위원장 A씨 모친상을 알리는 조합 명의 부고장. 조의금 계좌에 노조 계좌를 적어놨다. /택배노조

실제로 택배노조는 그로부터 불과 1개월여 전까지도 해당 계좌로 택배 기사 과로사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일반 시민을 상대로 ‘노조 후원금’을 걷었다.

한겨레신문과 페이스북에 올린 후원 요청 광고에서, 노조는 “과로사 대책 없이는 택배노동자는 9월이 두렵다”며 후원 계좌 번호를 적어넣었는데, A씨가 조의금을 받은 계좌와 같은 계좌 번호였다. 안내문에는 ‘#늦어도_괜찮아’ ‘#택배기사님_감사합니다’ ‘#택배노동자_과로사_대책마련’ 등의 구호가 함께 적혔다.

택배노조가 2020년 9월 한겨레신문에 실은 후원 요청 광고. 여기에 적힌 계좌번호는 그로부터 한달 뒤 택배노조 수석부위원장 A씨의 모친상 때는 조의금 수취 계좌로 활용됐다. /한겨레

또 2019년 5월에는 택배노조 사무실 이전 개소식 행사를 알리며 해당 계좌로 후원금을 받았다.

작년 1월에는 민노총이 산하 조직들에 해당 택배노조 계좌로 돈을 보내라고 직접 독려했다. 양경수 민노총 위원장은 본인 명의 공문에서 산하 다른 업종의 노조들도 택배사와의 싸움을 위한 ‘연대행동’에 나설 것을 독려하면서 ‘투쟁기금’을 해당 계좌로 보내라고 적었다.

이렇게 모은 후원금이나 투쟁기금을 어디에 썼는지 택배노조는 지금까지 공개한 바 없다.

한 현직 회계사는 “기업에서 이런 식으로 계좌를 운영했다면 국세청 조사 대상”이라고 했다. 재경 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노조 명의로 계좌를 개설해놓고 실제로는 개인 계좌로 활용했다면 금융실명제법 위반이고, 횡령·배임 여부를 살펴볼 필요도 있어 보인다”고 했다.

조선닷컴은 계좌 혼용에 관한 A씨 입장을 듣고자 A씨에게 연락했지만 답이 없었다. 택배노조 사무처 측은 이에 대한 질문에 “왜 남의 노조 활동에 관심을 갖느냐”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경기 김포의 한 택배 대리점 점주를 괴롭혀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한 혐의를 받는 택배노조원들이 작년 4월 법원 청사를 나서는 모습. 이들은 작년 12월 1심에서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A씨는 택배기사 출신이 아니다. 민노총 활동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2006년엔 민노총 통일위원장 자격으로 북한 평양의 ‘혁명열사릉’을 참배해 물의를 빚었다. 혁명열사릉은 북한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장소로, 김일성 일가는 물론 6·25 당시 인민군 장성으로 국군과 민간인 살해에 개입된 전쟁범죄자 다수가 묻힌 곳이다.

A씨는 2007년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출마했다 떨어졌고, 이후 우체국 택배에 취업해 노조를 조직했다. 택배기사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직)’로 분류돼 노조 설립이 어려웠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6개월만인 2017년 11월 고용노동부는 택배노조 설립을 허용했다.

택배노조는 2019년 택배기사의 잇따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급격히 세를 불렸고, 이후 파업 불참 배송 기사 폭행, 대리점주 집단 괴롭힘, CJ대한통운 본사 불법점거 등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