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이 23일 ‘정부 방침대로 회계를 공시하겠다’고 밝힌 것은 우리 노동계 3대 적폐 중 하나가 정리되는 이정표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노총과 민노총 등 거대 노조의 강성 파업과 깜깜이 회계, 노노(勞勞)간 착취는 노동계 고질병이자 개혁 대상으로 꼽혔다. 윤석열 정부는 작년 말부터 ‘노조 부패’를 공직·기업 부패와 함께 한국의 3대 부패로 규정하고 노조의 회계 투명성 확보를 추진했다. 정부의 이런 방침에 반발하던 한노총이 ‘회계 공시’를 선언한 것은 현 정부 노동 개혁의 성과로 풀이된다.

회계 서류 현장 조사 거부하는 민노총 - 지난 4월 21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무실 앞에서 노조 관계자들이 회계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 조사를 나온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을 막아서고 있다. 이날 조사는 금속노조가 "자료 비치 의무를 제대로 지키고 있다"며 거부해 무산됐다. /연합뉴스

그동안 거대 노조의 ‘깜깜이 회계’는 노동계 안팎에서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노조가 조합비를 얼마나 거둬 어디에 쓰는지 불투명했다. 한노총과 민노총은 매년 1000억원 이상의 조합비를 거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년간 정부와 광역자치단체 17곳에서 받은 지원금만 1520억여 원에 달했다. 그런데도 노조 회계 장부는 일종의 성역처럼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전 정부는 ‘노조 자율성 보장’을 거론하며 이 문제에 눈을 감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말 “기업 회계 투명성 강화를 통해 우리 기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며 “노조 활동도 투명한 회계 위에서만 더욱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거대 노조들은 매년 수천억 원을 쓰면서도 회계 처리를 주먹구구로 하는 경우가 많아 횡령 등 비리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해외 출장도 가고, 조합원 자녀 영어 캠프 비용으로도 썼다. 조합비가 친북 사업에 활용된 사례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 MZ세대 조합원을 중심으로 “내가 낸 조합비가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거대 노조는 ‘노동 탄압’이란 주장만 반복했다.

올해 초 정부는 ‘현행법대로 회계 서류를 사무실에 비치했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서류 표지와 안쪽 면 1장을 사진 찍어 보내라고 했는데 대다수 노조는 ‘탄압’이라며 거부했다. 이후 정부는 조합원은 물론 일반 국민도 볼 수 있는 노조 회계 공시 시스템을 만들었다. 조합원 1000명 이상 노조가 회계 자료 입력 대상이다.

정부는 관련 법과 시행령을 바꿔 노조가 회계 공시를 해야 조합원이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조합원이 매달 3만원씩 1년간 36만원을 냈다면 연말에 5만4000원(36만원의 15%)을 돌려받을 수 있는데 그 전제가 노조의 회계 자료 공시다. 한노총 산하 A 기업 노조가 회계 공시를 하더라도 한노총 본부가 회계를 공시하지 않으면 A 기업 노조원은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노동계 관계자는 “한노총 본부가 당장 금전적 손해를 보는 개별 노조와 조합원들 입장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한국노총의 (공시) 참여는 노조 회계 투명성과 합리적인 노사 관계 정착에 있어 의미 있는 진전”이라며 “제도가 정착하도록 노조와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지원하겠다”고 했다.

민노총은 아직 회계 공시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내부에선 ‘한노총처럼 공시를 해야 한다’는 의견과 ‘공시하면 정부에 숙이고 들어가는 꼴’이라는 반대론이 맞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깜깜이 회계’와 함께 거대 노조 3대 적폐로 꼽히는 강성 파업과 노노 간 착취 문제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현 정부가 화물연대의 물류 파업에 원칙 대응한 이후 파업 현장에서 폭력 등 불법 행위가 줄었다는 평가나 나오고 있다. 합법적 파업은 보장하되, 불법 파업에는 법치를 적용하겠다는 원칙이 유지되면서 현장 분위기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노노 간 착취 문제의 경우 정부는 상급 단체 탈퇴를 강제로 막는 노조 규약 등에 대해 계속 시정 조치를 내리고 있다. 정부는 주 52시간제 개편 등 노동시장 개혁 작업도 조만간 재개할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