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8시 50분 무렵이면 서울 용산구 소재 IT 기업 직원들이 하나둘 화장실로 간다. 9시 정각에는 7층 80좌석 가운데 10여석이 비어있다. 오전 9시는 국내 주식시장이 열리는 시각이다. 이 회사 직원 이모씨는 “집단 배탈이 아니라, 주식에 투자하는 직원들이 전날 밤 뉴스를 반영해 최대한 빠르게 주식을 사고팔려고, 상사 눈을 피해 스마트폰을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로 몰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 소식이 전해진 이달 10일 아침에는 20여 명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개인투자자를 의미하는 동학개미/뉴시스

보다못한 이 회사 과장이 한번은 “업무 시간에 주식을 하면 어떡하느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직원은 처음엔 “화장실에 가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추궁이 이어지자 “인사 고과 B등급 주셔도 됩니다”라고 답했다. 과장은 “정규직은 쉽게 잘릴 일 없으니, 대충 일하고 월급만 챙겨가겠다는 소리였다”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보냈다”고 했다.

‘코스피 랠리’가 직장 내 풍경을 바꾸고 있다. 직장인들이 너도나도 스마트폰으로 주식을 하고, 모이면 주식 얘기다. 고액 연봉 대기업 직원이라고 다르지 않고, 회사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 이유를 직장인들에게 물어봤다. 한 대기업 4년 차 직원이 “‘벼락거지’라는 말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아파트 값과 주가 급등으로 ‘벼락부자’가 속출하면서, 무리해서 집이나 주식을 사지 않고 직장에만 충실했던 사람은 하루아침에 상대적 빈곤 상태가 됐다는 의미였다.

또 다른 대기업 6년 차 직원은 “주식은 2030 직장인에게 구원(救援)”이라고 했다. 그는 “작년까지 ‘우리 세대는 수년을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 입사했지만, 그래봤자 월급으론 집 한 채 못 산다’는 생각에 만사가 허망했고, 우울증 기미까지 있었다”며 “그런데 최근 주식시장 활황으로 드디어 우리에게도 아파트 매수 종잣돈을 만들 기회가 온 것”이라고 했다.

양준모 연세대 교수는 “주택 정책 실패와 주식시장 과열이 겹쳐 젊은 층 사이에 자본 소득에 대한 박탈감이 만연하면서, 노동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상황”이라며 “그러나 실물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은 자산 가격 상승은 버블이 언젠간 꺼질 수밖에 없고, 그땐 막대한 사회적 후유증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삑! 거래가 체결되었습니다.”

지난 13일 오후 업무 시간, 고요하던 경기 일산 신도시의 한 건설사 사무실에 이런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입사 2년 차 사원 현모(28)씨의 휴대전화에서 난 소리였다. 현씨는 “항공 관련주가 ‘떡상’(가격 급상승)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예금 300여만원을 해지하고 주식을 샀는데, 볼륨 끄는 걸 깜빡했다”고 했다. 당연히 팀장 경고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현씨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며 “내게 회사는 주식을 안정적으로 굴릴 수 있도록 매달 350만원 남짓 고정 수익을 주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했다.

현씨 같은 사람이 늘어난 것은 통계로 어느 정도 확인된다. 주식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주식 거래 활동 계좌 수는 3370만개. 올해 들어서만 14%가 늘었다. 특히 회사 PC를 이용하지 않고도 주식을 즉시 사고팔 수 있는 ‘휴대전화 주식 거래 시스템(MTS)’ 이용자는 올해 들어 폭발적으로 늘었다. A증권의 경우 MTS 하루 평균 이용자 수가 재작년 44만6000명, 작년 45만8000명으로 큰 변화가 없다가, 올해에는 80만3000명으로 단번에 거의 배(倍)가 됐다.

근로 의욕 저하로 이어진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황모(28)씨는 “여기저기서 부모 도움 받아 산 아파트로 억대를 벌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내겐 그럴 돈이 없고, 대출도 막혔다”며 “월급 오르는 속도는 감히 집값 상승률 근처에도 못 가는데, 자연히 직장 일보다는 투자 법에 관심이 간다”고 했다.

대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IT 업계에서 일하는 입사 6년 차, 월 600여 만원을 받는 최모(34) 대리는 올해 들어 미국 주식 시장에 투자하는 이른바 ‘서학 개미’가 됐다. 출근만 하면 잠이 쏟아진다. 미국 주식시장 개장이 우리 시각으로 오후 11시 30분이라 새벽 2~3시쯤 잠드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최씨는 “최근엔 회의 일정을 까맣게 잊다가, 회의 하루 전에 급하게 준비하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한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 임원은 “서학 개미보다는 동학 개미(국내 주식 투자자)가 차라리 낫다. 동학 개미는 중간중간 한눈을 팔지만, 서학 개미는 아예 오전에 졸고 있으니까”라고 했다.

태업하는 직원들을 질책하고 독려해야 할 기업의 ‘허리급’들도 무기력증을 호소한다. 대형 회계법인의 시니어 매니저 정모(34)씨는 “입사 직후 선배들에게 ‘열심히 해서 승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믿었다”며 “그런데 나는 일만 열심히 하다가 집 살 시기를 놓쳐 전세살이를 하고, 청약 등 부동산 투자 정보를 공유하며 미리 집을 산 후배들은 나보다 수억원씩 더 벌었다. 고작 연봉 2000만~3000만원 많은 내가, 어떻게 이들에게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고 잔소리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후배들이 문제가 아니고 내 가치관이 완전히 무너진 기분이라 울적하다”고 했다.


일 잘하는 김부장, 갭투자 잘한 장대리가 너무부럽다

#1. A기업에 다니는 9년 차 직원 박모(33)씨는 ‘에이스 직원’과는 거리가 멀다. 상사와 선배들로부터 “회사 일에 충실하다” “일에 대한 집중도가 높다”는 평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박씨는 그보다 후배인 ‘주니어 사원’들의 롤 모델이다. 회사 후배들은 박씨와 만날 기회가 생기면 “어떻게 하면 선배처럼 될 수 있느냐”고 종종 묻는다. 그는 2017년 서울 중계동 아파트 한 채를 ‘갭투자’로 샀다. 당시 사내에서는 “업무시간에 갭투자처나 알아보고…” “저러다 집값 급락하면 깡통 찰 것” 등 뒷말이 적지 않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5억2000만원짜리 아파트였지만, 보증금 4억원의 전세 세입자가 들어 있어 실투자금은 1억2000만원이었다. 통장 잔고가 1000여만원에 불과했던 박씨는 회사 대출 5000만원과 마이너스통장 등을 이용해 1억여원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뜻)’했다. 3년여가 지난 지금, 그 아파트 시세는 11억원이다. 30대 초중반의 나이지만 서울 아파트 보유자가 된 것이다. 박씨는 “동기들과 비교하면 결국 내가 이긴 것”이라고 했다.

#2. 이달 3일 오후, 서울 소재 외국계 기업 B사 영업부 사무실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날이 ‘과천 아파트 청약일’이란 걸 뒤늦게 안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한꺼번에 청약 신청을 한 것이다. 직원 간에 청약사이트 주소와 청약용 공인인증서 발급 방법 등을 물어보는 대화가 왁자지껄 오갔다. 이를 지켜본 부장 정모(43)씨는 “업무시간이었지만 직원들을 나무랄 순 없었다”며 “걔네 입장에서 청약이란 열심히 월급을 모아서는 불가능해진 내 집 마련과 계층 이동의 사실상 유일한 기회니까”라고 했다.

정 부장 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24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근로자 평균 연봉은 2014년 대기업 6278만원에서 2019년 6487만원으로 3.3% 올랐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연말 기준) 서울 아파트 중위값은 4억7975만원에서 8억9751만원으로 거의 배(倍)가 됐다. 지금은 9억3000만원이 넘는다. 이로 인한 ‘부동산패닉’과 ‘부동산블루’가 직장 풍경을 바꾸고 있다.

여의도의 C금융 회사에서 연봉 8000여만원을 받는 직장인 황모(27)씨는 요즘 출근 후 동료들과 전날 올라온 부동산 유튜브 영상 관련 대화를 나누는 게 일과다. “어젯밤 ‘빠숑’(인기 부동산 강사) 유튜브 봤느냐” “XXX가 추천한 4억 이하 고양시 아파트 영상 봤느냐” 등이다. 황씨가 구독하는 부동산 관련 유튜브 채널만 8개. 황씨는 “새로운 부동산 인기 콘텐츠가 있는지 매일 검색해 챙겨보고, 직장 동료들과 공유한다”고 했다. 작년까진 안 그랬다. 퇴근 후 매일 밤 11시까지 대학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를 했고, 결국 지난해 원하는 회사로의 이직에도 성공했다. 연봉 2000만원이 올랐다. 그러나 뿌듯함은 잠시였다. 연봉이 자기 절반밖에 안 되던 한 대학 동기가 대출을 끌어모아 서울 변두리 지역에 아파트를 샀다는 이유만으로 수억원대 시세 차익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황씨를 바꿔놨다. 황씨는 “내가 어리석었다”며 “요즘도 도서관에 다니지만 어학·회계 책은 라면박스에 담아 집 한쪽에 치워뒀고 대신 온라인 부동산 강좌를 노트 필기까지 해가며 듣는다”고 했다.

중학교 영어교사 김모(28)씨는 내년 결혼을 앞두고 남자친구와 매주말 데이트를 서울 시내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시작한다. 노원구 상계동, 강서구 가양동·등촌동 등 ‘예산 7억원’ 범위 내 지역을 찍어 놓고 매물로 나온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 시쳇말로 ‘임장(臨場·현장 답사의 일본식 표현) 데이트’다. 김씨와 예비 신랑의 직장 모두 서울이지만 두 사람이 마련 가능한 예산인 7억원 내로는 조건이 괜찮은 아파트가 없어 지난달에는 경기 용인 수지구까지 집을 보러 갔다가 인근 카페거리에서 데이트를 했다.

집을 사지 못했거나, 집값 상승 혜택을 보지 못한 이들은 박탈감과 위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심리는 직위가 높을수록 더했다. D 유통 대기업 임원 김모(50)씨는 강북 외곽지에 신혼 때부터 살아온 낡은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지만, 시세 차익은 크지 않다. 반면 김씨 후배 과장·부장급 직원들 가운데는 강남 소재 D사 접근성이 좋은 지역에 아파트를 매입해 수억~수십억원대 시세 차익을 본 이들이 많다. 김씨는 “새벽별보며 출근해가며 회사에 청춘을 바쳤고 그걸 인정받아 고속 승진해 지금은 2억원 넘는 연봉을 받지만, 후배들을 보면서 ‘내가 제대로 살아온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