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高齡) 운전자에 대해 운전 능력에 따라 야간, 고속도로 운전 등을 금지하는 ‘조건부 면허제’가 시행된다. 경찰청은 최근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가 늘고 있어, 2025년 도입을 목표로 이 같은 제도를 추진한다고 29일 밝혔다.

조건부 면허란 운전 가능 시간과 장소, 제한 속도, 운전 행태 등 특정 조건을 지킨다는 약속하에 제한적으로 운전을 허용하는 제도다. 개개인의 운전 능력에 따라 야간이나 고속도로·도심 운전 등 허용된 범위 이외의 운전은 금지된다.

경찰은 고령 운전자의 운전 능력 평가를 위해 가상현실(VR)을 활용하기로 했다. VR 기기를 쓴 채 야간, 고속도로 등 가상의 운전 상황에서 대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경찰은 이를 위해 3년간 총 36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국내 고령 운전자의 기준은 65세부터다. 이날 이 같은 계획이 알려지자, 일각에선 “100세 시대에 65세가 무슨 고령자냐” “고령이 문제가 아니라 음주운전부터 제대로 처벌하라” 등 비판이 나왔다. 이에 대해 경찰청 관계자는 “구체적인 적용 연령은 아직 정하지 않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한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자료=경찰청

경찰이 고령 운전자에게 ‘조건부 면허제’를 적용하겠다고 나선 것은 최근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서울 서초구에서는 A(82)씨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갑자기 미용실로 돌진해 30대 여성 손님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원인은 고령 운전자의 운전 미숙이었다. 지난 9월에는 부산 중앙대로 서면교차로 인근 8차로에서 B(86)씨가 몰던 승용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반대편에서 오던 마을버스와 충돌해 9명이 다쳤다. 전체 교통 사망 사고 중 65세 이상 운전자가 낸 사고 비율은 2016년 17.7%에서 지난해 23.4%로 늘었다.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는 지난해 기준 368만여 명으로 전체 운전자의 11.1%에 해당한다. 경찰청은 이 숫자가 2025년에는 498만명으로 5년 새 130만명가량 늘어날 것으로 본다.

현재 정부는 65세 이상 운전자의 경우 5년마다 적성검사를, 75세 이상은 3년마다 적성 검사와 함께 교통안전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 교육에 시각·청각 반응, 기억력·주의력 측정 등 운전 적합성 평가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실제 주행 능력을 평가하지 않아 실효성이 낮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와 각 지자체는 65~70세 이상 고령 운전자가 자발적으로 면허를 반납하면 지역상품권·교통카드 등을 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참여자는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서울시는 70세 이상 시민이 면허증을 반납하면 버스·편의점 등에서 쓸 수 있는 10만원이 충전된 교통카드를 준다. 하지만 지난해 면허 반납자는 전국 7만6790명으로 전체 고령자의 2.2% 수준이었다. 일부 노인은 “교통 여건이 나쁘거나 거동이 불편한 경우엔 차가 필수라 어쩔 수 없다” “차를 자주 타는 것도 아닌데, 면허증 반납에 대한 상실감이 크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날 경찰의 ‘조건부 면허제’ 시행 방침이 알려지자, 온라인에선 “나이에 따른 부당한 차별” “고령자 운전 제한은 생계뿐 아니라 기본권을 제약하는 조치” 등 반발이 잇따랐다. 논란이 이어지자 경찰은 “앞으로 진행할 연구 결과에 따라 적용 연령은 달라질 수 있다”며 “평가 결과에 따라 일괄적으로 면허를 취소하면 생계형 고령 운전자에게 가혹할 수 있는 만큼 주간·단거리 운전, 고속도로 외 일반도로 운전 등 조건부로 운전을 허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경찰은 VR(가상현실)을 활용해 야간·고속도로 운전 등 운전자의 상황별 대처 능력을 평가하고, 의사와 교통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운전 조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릴 계획이다.

해외 국가들도 고령자 운전 사고를 줄이기 위한 여러 제도를 시행 중이다. 미국 뉴햄프셔주는 75세 이상 고령자를 상대로 4년마다 실제 주행 시험을 본다. 일본은 65세 이상 운전자가 급발진 억제 등 운전 보조 장비를 장착할 경우 보조금을 주고 있고, 이를 의무화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뉴질랜드는 75세 이상 운전자를 상대로 2년마다 신체 검사를 해 그 결과에 따라 교정 렌즈 착용, 자동변속기 차량, 운전 지역 한정 등 운전 조건을 제시한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한국도 현재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운전면허 신체검사를 까다롭게 하고, 면허 갱신 시 실제 주행 시험을 실시하는 등 좀 더 실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