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전 5시쯤 서울 성북구의 한 인력 사무소에 박모(42)씨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용직 근로자를 건설 현장과 연결하는 곳이다. 소장 김영식(69)씨는 박씨의 신상명세서를 꼼꼼히 읽었다. 김씨는 “원래 일을 주기 전에 혈압 정도만 확인했는데 이젠 혈당 수치나 주량, 흡연 여부까지 적어 오라고 한다”며 “혈압도 혼자 재보라고 하지 않고 내가 직접 잰다”고 했다. 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을 현장에 보냈다가 사고라도 나면 거래처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는 정확하게 혈압을 재려고 최근 혈압측정기도 새것으로 바꿨다고 했다. 산업재해 발생 시 기업 경영진을 처벌할 수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지난달 27일부터 시행된 이후 생긴 변화다. 법 시행 후 약 3주가 지나면서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를 뽑을 때 건강과 나이 등 각종 조건을 전보다 훨씬 더 깐깐하게 따지고 있는 것이다.

작년 마지막날인 12월 31일 오전 전국 최대 규모의 인력시장인 서울 남구로역 부근에서 근로자들이 대기해 있다. 2021.12.31 /연합뉴스

공사 현장 분위기도 달라졌다. 서울 광진구 한 대형 주택 공사 현장 팀장은 “법 시행 후 직원들이 수시로 인부들을 따라다니며 상태를 확인하게 한다”며 “건강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보이면 일을 중단시키고 현장에서 혈압 검사 등을 받게 하고 불안하면 돌려보내기도 한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 탓에 국내 주요 인력 시장에선 일감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11일 기자가 새벽에 찾아간 서울 동대문구의 한 인력사무소에서도 근로자 13명 중 6명이 일을 구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 사무소 직원 박모씨는 “나이가 다른 분들보다 많고 혈압도 높아 일을 못 구하신 것”이라며 “요즘 일감도 전반적으로 적은 데다 중대재해처벌법 도입 후 근로자 조건을 까다롭게 따지는 경우가 많아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건설 현장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박모(61)씨는 “건강 상태를 많이 따진다고 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혈압약까지 챙겨 먹고 나왔는데 허탕을 쳤다”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인력 사무소와 근로자들 사이에선 법 시행 후 공사 현장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 인력사무소 관계자는 “건설사 직원이 일하는 도중에 갑자기 다가와 혈압을 재자고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민감한 분위기”라고 했다. 특히 근로자 나이나 혈압 같은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과거에 사실상 서류로만 챙기는 요식 행위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혈압, 코로나 백신 접종 여부 등 확인하는 게 많아 중·장년 근로자들이 일감을 얻기가 더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한 근로자는 “가뜩이나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여파로 일감이 줄었고, 겨울은 공사가 다른 계절보다 적은 시기인데 재해처벌법까지 시행돼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고 했다. 이 때문에 중장년 근로자들 사이에선 “60대 이상은 원래도 혈압이 높은 경우가 많으니, 혈압을 오르게 할 수 있는 커피 같은 건 평소에 마시지 말라”는 얘기도 돈다고 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초기 ‘본보기’가 될까 봐 건설사들이 연초 공사를 자제하고 있는 탓에 일감이 크게 줄면서 폐업에 내몰린 인력 사무소도 나오고 있다. 서울 중랑구에서 20년째 인력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신모(70)씨는 작년까지 하루에 평균 20명을 고용해 건설 현장으로 보냈는데, 올 들어 그 인원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고 했다. 일거리를 중개해주는 대가로 근로자 일당의 10%를 챙겨온 신씨의 인력 사무소 수입도 30% 가까이 줄어들었다. 그는 “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일 찾는 사람들을 마냥 집으로 돌려보내자니 가슴이 답답하다”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근에 인력 사무소만 40여 곳이 있었는데 폐업이 잇따르더니 작년 초부터 최근까지도 4~5곳 정도가 문을 닫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