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평온하게 컵라면을 후루룩 먹는 여자. 양복 입고 아이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남자. 단소로 승객을 위협하는 단소살인마까지. 우리나라에는 각양각색의 지하철 빌런들이 존재한다. 빌런들이 너무 자주 등장해, 이제 웬만한 자극적인 빌런이 아닌 이상, 승객들은 반응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오랜만에 승객들의 이목을 끈 지하철 빌런이 등장했다. 그는 더운 날씨에 기사단 복장에 투구를 쓰고, ‘꽥’ 소리가 나는 닭인형을 계속 눌렀다.

11일 트위터 등에 올라온 '지하철 1호선 빌런' 사진. /트위터

11일 트위터,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1호선. 지하철 탔는데 이 새X 뭐냐. 닭 누르면서 계속 꽤액 소리냄. 성경책도 들고 있음”이라는 글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에는 핑크색 점퍼를 입은 여성 옆에 기사단 복장을 입고 투구를 쓴 남성 A씨가 앉아 있었다. A씨 손에는 닭 인형과 성경 책이 들려 있었다. 작성자는 A씨가 갑자기 투구를 벗더니 지하철 내 승객들에게 인사를 했다고도 전했다.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새로운 빌런이군”, “역시 매운맛 1호선”, “빌런 진짜 많다. 이제는 체념하고 즐김”이라며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A씨의 투구, 성경책, 닭인형. 정신과 약을 끊고 발작 증세로 고통 받았던 A씨는 투구를 쓰고 난 뒤, 발작 증세가 멈췄다고 한다./A씨 소셜미디어

그러나 A씨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오던 A씨는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약을 끊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겪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다. 힘들었던 그 시기, 그를 살린 건 투구와 기사단 복장이었다.

A씨는 12일 조선닷컴에 “대인기피증이 심해 10년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더 나아지지도 않고 약 먹으면 너무 졸려서 사회생활을 못하니 약을 끊었다. 그러고 나서 버스 같은 걸 타면 가끔 혼자 소리를 지르고 발작을 하더라. 약 끊고 나서 몇 달 뒤에 빚도 생기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투구와 기사단 복장을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했다. 그리고 남은 돈 다 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고 말했다.

A씨는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기사단 복장 차림으로 외출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발작 증세가 멈췄다고 한다. A씨는 “투구 때문에 뭔가 심리적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신기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모르는 사람들이랑 말도 섞고 셀카도 찍었다. 별 일 없이 집에 돌아오니까 기분이 묘했다. 아마 다음 정신감정 검사에서 정상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이렇게 입고 다닐 거 같다”고 말했다.

A씨는 자신의 사연을 자주 가는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 등에도 공유했다. 이 글을 본 네티즌들은 “힘내라”, “노력하는 모습 좋다”, “이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네. 치료법 찾아서 다행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치료받고 운동하면서 제 삶을 찾고 있다.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풀어내기까지 힘들었을텐데 고생했다”라며 A씨를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