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옥상

서울시가 28일 성추행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민중미술가’ 임옥상(73)씨가 시립 시설에 설치한 미술품을 다음 달부터 모두 철거하기로 했다. 이날 오전 문화체육관광부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걸려 있던 임씨의 그림 ‘안경’을 철거했다. 앞서 국회도서관도 지난 11일 복도에 걸려 있던 임씨 작품을 철거한 바 있다. 임씨가 지난 6일 재판에서 성추행 혐의를 시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공 기관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을 철거하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이날 서울시는 임옥상씨 작품 철거 관련 보도 자료를 내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작가의 작품을 유지·보존하는 것이 공공 미술의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전부 철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임옥상씨의 작품은 전국에 100여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서울시가 철거하기로 한 작품은 모두 6점이다. 서울 남산 일본군 위안부 추모 공원 ‘기억의 터’에 설치돼 있는 ‘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과 서울시 서소문청사 앞에 있는 ‘서울을 그리다’,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의 ‘하늘을 담는 그릇’, 성동구 서울숲에 있는 ‘서울숲 무장애 놀이터’, 종로구 광화문역에 있는 ‘광화문의 역사’ 등이다.

◇임씨, 혐의 시인... 징역 1년 구형

서울시는 임씨의 1심 판결 선고가 나온 뒤 이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철거할 방침이다. 임씨의 1심 선고는 다음 달 17일로 예정돼 있다. 임씨는 앞서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 상태다.

특히 위안부 추모 공원은 박원순 전 시장이 2016년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임씨의 작품이 있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성 비위를 저지른 박 전 시장과 임씨가 위안부 추모 공원을 만든 모순적인 상황이 드러났다”며 “추모 공원을 위선적인 성 비위자들의 상징이 되게 놔둘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기억의 터’는 2016년 당시 ‘건립 추진 위원회’가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조성한 점을 고려해 추진 위원회와 성금을 낸 시민들의 의견을 듣는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했다.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작가 임옥상씨의 미술 작품들. 위 사진은 2016년 서울 남산 일본군 위안부 추모 공원 ‘기억의 터’에 설치된 조형물 ‘대지의 눈’으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4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래는 각각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에 있는 ‘하늘을 담는 그릇’과 서울 성동구 서울숲의 ‘무장애놀이터’다. 서울시는 28일 서울시 시설 내에 있는 이 작품을 전부 철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태경 기자·서울시

그동안 임씨는 이른바 ‘민중미술가’로 불렸다. 그는 1970~80년대 민중운동에 참여했고 18대, 19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문재인 전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다. 또 2017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집회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임씨가 그린 탄핵 촛불 집회 관련 그림인 ‘광장에, 서’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청와대 본관에 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임씨는 2013년 자신이 운영하는 미술 연구소 직원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지난달 기소됐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검찰은 임씨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이에 대해 임씨는 최후 진술에서 “10년 전 순간의 충동과 잘못된 판단으로 피해자에게 피해를 줬다.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를 드린다”며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해자 측 변호사는 “후배 미술인을 양성하고 보호해야 할 민중미술계 원로 작가인 임씨가 추행 행위로 피해자에게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안겼다”며 “엄중한 처벌을 내려달라”고 했다. 임씨는 당시 재판을 비공개로 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국에 100여 점... 철거 요구 잇따를 듯

임씨의 작품은 전국 각지에 공공 미술품 등으로 전시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청계천에 있는 ‘전태일 동상’,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년을 맞아 봉하마을에 세운 ‘대지의 아들 노무현’, 경기 화성시 매향리 평화기념관에 있는 ‘매향리의 시간’, 제주 김창열미술관의 ‘김창열 조각상’ 등이 모두 임씨의 작품이다. 대검찰청 안에 있는 ‘이준 열사 흉상’과 민주당사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흉상’도 임씨 작품이다.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도 임씨의 작품 ‘대지-어머니’가 있다.

각 지자체의 대표적인 조형물 중에도 임씨의 작품들이 있다. 경기 성남의 ‘분당 율동공원 책 테마파크’와 ‘빛의 나라’, 전남 영암 구림마을의 ‘세월’, 광주광역시 지하철 농성역의 ‘솟아오르는 산’ 등이다.

임씨의 작품 중에는 어린이 놀이터도 있다. 서울에는 여의도 국회 내 ‘애벌레의 꿈’, 종로구 창신동의 ‘산마루놀이터, 풀무골무’ 등이 있다. 또 경기도에는 시흥의 ‘까치야 놀자’, 안양의 ‘천사유치원 놀이 램프’ 등이 임씨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