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정두영. /KBS 보도화면 캡처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은 법무부 장관에게 ‘사형 판결 확정일 6개월 이내에 집행 명령을 내리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사형은 명령 5일 이내에 집행돼야 한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는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59명이 길게는 30년째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법논리적으로만 따지면, 2007년 앰네스티가 부여한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란 이름은, 역대 법무장관들의 직무유기가 빚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여름 묻지마 흉기테러가 잇달아 터졌고, 법무부는 전국 각지에 수감됐던 사형수들을 서울구치소로 한 데 모아 수감했다. 서울구치소엔 실제로 사형 집행이 가능한 시설이 있다.

일각에서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법조계 관계자는 “법치국가에서 ‘사형제 폐지’를 하려면 국회가 법을 바꾸는 게 순서”라며 “그 법이 존재하는 한에는 법무부나 정부가 그걸 집행하는 게 헌법적 임무 아닌가”라고 했다. 현 법무부의 공식 입장도 “사형은 야만적 복수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에 합치된다”는 것이다. /편집자주

“다급해서 그랬다. 어쩌면 내 속에 악마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2000년 4월 ‘맨손 살인마’ 정두영은 체포 당시 ‘왜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였느냐’는 질문에 태연히 이런 대답을 내놨다. 이틀에 걸친 현장 검증에서도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 차분함과 대조적으로, 범행 현장의 시신 9구는 신원을 분간하기 힘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 참혹함에 경찰은 ‘원한에 의한 살인’일 거라 확신, 한동안 범행 간 연관성조차 찾지 못하고 헤매야 했다.

부산, 울산, 천안 등 범행 장소는 제각각이었지만 그래도 공통점은 있었다. 낮 시간대 방범 시스템이 꺼진 부유한 집만 골라 강도살인을 벌였다. 키 170cm 안팎에 마른 체형이었던 정두영은 철저하게 노약자나 가정부만 노렸다.

집안의 생계를 짊어졌던 가정부가 3명이나 희생됐다. 남편과 사별했거나, 남편이 몸져누워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여성 2명과 월급 대부분을 가족에게 송금하던 조선족 여성이었다.

그렇게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한 연쇄 살인은 1999년 6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정두영의 맨손으로 행해졌다. 그나마 자백이 없었다면 연쇄 살인의 실체는 드러나지 못한 채 묻힐 뻔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교도소에서 그를 보고 배웠다고 훗날 털어놨다. 유영철이 범행에서 망치를 쓴 점도 정두영과 판박이였다. 그렇게 2000년대 연쇄 살인 범죄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지난 2000년 부녀자 9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정두영.

◇미성년자 때 첫 살인, 그 후론 폭주했다

불우한 가정환경이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정두영은 2살 때 아버지가 숨지면서 어머니의 재가로 삼촌 집에 맡겨졌고 5살 어린 나이에 보육원에 보내졌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15살 때 보육원을 도망쳐 나온 뒤엔 남의 것을 훔치며 살았다. 2차례 특수절도 등 범죄의 길로 빠졌다.

정두영이 사람을 처음 죽인 것은 미성년자 때였다. 18살이던 1986년 6월 부산에서 칼을 들고 다니다 자기를 검문하는 방범대원의 가슴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그에게 내려진 처벌은 소년원에서의 12년 옥살이.

만기 출소했을 때 그는 서른 살에 불과했다. 그 뒤에도 절도와 강도를 일삼았다. 강도 행각은 그치지 않았고, 결국엔 연쇄 살인까지 이어졌다.

범행 동기는 단순했다. 돈이었다.

10억원을 모아 결혼도 하고, 아파트도 사고 PC방을 차리려고 했다. 그 목표를 위해, 그는 낮 시간대 방범 장치를 꺼두고 노약자나 가정부만 있는 부유한 집을 골라 털었다.

정두영은 강도질하러 갈 때 늘 빈손이었다. 오직 목장갑만 양손에 낀 채 담을 타 넘었다.

그러나 금품을 훔치다가 마주친 피해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거나 저항하면 폭주했다. 현장에서 흉기가 될만한 무엇이든 손에 쥔 뒤, 휘둘러 무자비하게 때렸다. 마땅한 물건이 없을 땐 맨손으로 때려죽였다. 그렇게 1~3개월 간격으로 살인했다.

가끔씩 죄책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고 그는 털어놨다. 그럴 때면 그는 거울을 보며 “이래서는 안 된다. 더 강해져야 한다”며 스스로 마음을 다져 하루, 이틀 만에 두려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정두영 연쇄살인 사건 현장. /MBC 보도화면 캡처

◇보육원 출신인 정두영이 살려준 단 한 사람, 아이 엄마였다

1999년 6월 2일 부산 서구 부민동 한 가정집에서 50대 가정부가 금품을 훔치던 정두영을 발견해 소리쳤다. 이 현장이 정두영의 연쇄살인의 시작이었다. 정두영은 가정부를 세면장으로 끌고 가 머리를 바닥에 내려쳐 실신시키고 목을 졸랐다.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의 옆집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당시 세상에 더 큰 충격을 줬다.

3개월 뒤에도 동대신동 한 고급빌라에서 가정부를 마구 때려죽였다. 1개월 후에는 울산으로 범행 장소를 옮겨 가정집에서 5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뒤 금품을 털어 나오다 20대 아들과 마주쳤다. 정두영은 이 남성과 육탄전을 벌이다 밀리자 집에 있던 망치로 제압해 살해했다.

당시 경찰은 각 사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고, 동일범일 수 있다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듬해 3월 부산의 대표적 부촌인 서구 서대신동 가정집에 들어갔다. 집주인의 언니인 40대 여성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저항하자 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곤 그 여성과 50대 가정부에게 이불을 뒤집어씌우곤 빼앗은 야구방망이로 부위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두들겨 살해했다.

피해자들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뒤에는, 시신 바로 옆에서 금고를 열려고 아령으로 금고 문을 수없이 내리쳤다. 2시간이 넘도록 금고를 때렸다. 옆집 주민이 “오후 내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공사하는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범행 현장에선 생존자가 나왔다. 외출했던 집주인인 여성이 뒤늦게 집에 돌아왔다가 정두영과 마주쳤다. 그는 “아이가 있으니 살려 달라”고 호소했고, 정두영은 뜻밖에 “아기 잘 키워라. 신고하면 죽인다”며 이불을 덮어씌우고 떠났다.

이는 정두영이 꼬리가 잡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생존자의 신고로 전국에 몽타주가 뿌려졌다.

정두영 몽타주.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화면 캡처

전국에 그의 몽타주가 뿌려졌지만, 정두영의 범행은 더욱 대담해졌다.

1개월 뒤엔 유명 기업 회장을 타깃으로 삼았다.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서 한 철강제조업체의 70대 회장과 70대 부인, 50대 가정부 등 3명이 흉기에 온몸이 찔려 숨졌다. 거실과 현관문 등엔 피가 가득했고, 시신에는 옷가지가 쌓여있었다. 이 시신을 옆에 두고 정두영은 집안 곳곳을 뒤졌다고 한다.

‘벤츠를 타보고 싶다’는 욕망에 차고에서 벤츠 승용차까지 꺼내 타고 달아났다. 경찰을 헷갈리게 하기 위해 현장에 크기가 다른 발자국 두 개를 남겨 놓기도 했다.

이때쯤 경찰은 그를 용의 선상에 올리고 행적 파악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 정두영은 태연하게 “겨우 맘 잡고 사는데 너무 그러지 마십쇼”라고 했다.

불과 나흘 후 충남 천안에서 덜미가 잡혔다. 한 가정집에서 부녀자를 인질로 잡아 현금 1000만원을 요구하다가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경찰 조사에서 부산 서대신동과 온천동에서 5명을 살해한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이전(1999년)에도 4명을 더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또 “1999년 3월 말 출소 이후 검거될 때까지 총 13번, 한 달에 한 번 꼴로 강도짓을 했다”고 진술했다.

현장 검증은 날, 유가족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한 유족은 “사형 좀 시켜줘요. 왜 그런 사람 살려 갖고 왜 몇 사람 생명을 앗아가게 하세요”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자식을 잃고 돌을 들고 온 어머니도 있었다.

결국 수사관들은 당일 현장 검증을 채 마치기도 전에 정두영을 피신시켜야 했다.

정두영의 현장검증 당시 모습. /SBS 그것이알고싶다 유튜브

◇“10억원 모아 애인과 잘살아보려고 그랬다”… 잔혹성은 의문

정두영은 ‘쾌락형 범죄자’ 강호순 등과는 달랐다.

애인과 마음껏 돈을 써보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범행을 저질렀다. 살인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과 수단일 뿐이었다. 프로파일러였던 표창원 전 의원은 그를 ‘한국형 연쇄살인범’으로 규정했다.

실제 그는 한 번에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6000여만원을 훔쳤다. 이렇게 모은 돈이 1억3000만원이었다. 정두영은 애인에게 청혼하며 7300만원이 든 통장을 만들어줬다고 한다.

돈이 목적이었지만, 잔혹한 살해 행각은 의문을 낳았다. 심리 분석 결과, 정두영은 자기 마음대로 범행 현장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매우 강했다. 범행 중 발각되면 달아나는 일반 범죄자들과 달랐다. 피해자들이 고분고분 지시대로 움직여주면 살려뒀지만, 자신을 얕보고 달려들거나 비명을 지르는 등 제압되지 않으면 격분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살인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두영은 살인 행각을 벌이면서 애인 박모 씨의 집에서 동거했다. 당시 박 씨의 부모에게 “옷가게를 한다”며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착실하고 얌전한 청년 행세를 했다. 정두영은 금목걸이 금팔찌 등을 애인에게 선물하고 부모에게도 옥반지 세트와 용돈을 줬다.

살인범 정두영이 지난달 초 대전교도소에서 탈옥을 시도했다. /TV조선

◇반성은커녕... 쇼생크 탈출 꿈꾼 사형수

법원은 2000년 7월 정두영의 살인죄 등 8가지 혐의를 인정하며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을 정도로 잔인한 범행 수법으로 9명이나 살해했다”며 “살인죄로 복역한 뒤 또다시 범행을 저지른 점 등을 볼 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사회로부터 소외됐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극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 판결은 이듬해 확정됐다.

“어머니를 숨지게 한 정두영이 잡혔으니 한은 조금 풀리셨겠죠.”

이 사건의 피해자 유족이 한 말이다.

당시 정두영은 “오히려 편안한 심경이다. 수천 번 태어나도 못 갚을 죄를 지었다. 용서해 달란다고 용서가 되겠느냐.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도소 장기수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그들도 사회에 적응이 어려워 출소하면 나같은 범행을 하게 된다”고 했다. 사회 탓이었다.

교도소에 들어간 정두영은 반성 대신 탈옥을 시도했다. 2016년 교도소 작업장 안에서 만든 4m짜리 사다리를 이용해 교도소 담장 3개 중 2개를 넘어 거의 탈옥에 성공할 뻔했지만, 두 번째 담장의 감지 센서가 울리면서 교도관들에게 발각됐다. 도주미수 혐의로 기소된 정두영에게 징역 10월이 추가 선고됐다.

법무부는 이런 정두영을 지난 여름 서울구치소로 옮겨놨다. 거기엔 작동 가능한 사형 시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