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발생 전 큰아들 박한상과 부모. /온라인 커뮤니티

1997년 12월30일 집행을 마지막으로 26년간 법조문으로만 존재하던 사형(死刑)이 다시 현실로 부활할까.

지난 여름 잇따른 묻지마 흉기살인에 분노한 여론으로 시작된 사형 집행 부활 요구는 법조계에서도 화두가 됐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8월 “대한민국은 사형 제도가 법에 명시돼 있다”고 밝힌 뒤, 각지 사형 시설에 대한 점검을 거쳐 전국 사형수들을 서울구치소로 몰아넣었다. 법무부 장관은 형사소송법이 규정하는 사형 집행 명령권자다.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자도 지난 3일 인사청문회에서 사형제 폐지에 관한 물음에 “극히 잔혹하면서도 반인륜적인 범죄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국민의 법 감정이나 사형제도가 가지는 응보형으로서 상징성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국내에는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59명이 길게는 30년째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이들의 면면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1994년 5월 19일. 서울 삼성동 고급 주택가에 있던 2층 양옥집에 불이 났다. 새카맣게 탄 부부의 시신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목덜미부터 다리까지 온몸에는 난자(亂刺)의 흔적이 가득했다. 잔혹하게도, 남자의 심장에는 구멍이 났다.

사망한 40대 부부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며 100억 원대 자산가로 자수성가한 박모씨와 그의 아내 조모씨였다. 첫 신고는 한집에 살던 큰아들이 했다.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었더니 불이 나 있었고 급한 마음에 혼자 빠져나왔다, 부모님이 아직 집 안에 계시니 도와달라”는 전화였다.

마치 부모의 죽음과 살아남았다는 자책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23살 큰아들 박한상은 오열했다. 사람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유산을 손에 넣은 패륜아의 기쁨의 눈물이었다는 걸. 끔찍한 연기였다. 그날 밤 부부를 죽인 건 그토록 귀하게 키운 장남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40여 차례씩 찌르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냈다. 그리고 아주 태연히, 울었다.

박한상과 부모님이 살던 서울 삼성동 2층 자택이다. 사건 발생 후 화재로 불타버린 모습. /채널A 뉴스 유튜브 영상

◇ 간호사의 증언, 종아리의 상처 그리고 자백

처음 경찰은 재산을 노린 단순 강도·방화를 의심했다. 그러나 사라진 물건은 없었고 부검 결과 기도와 폐에서 그을음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불이 나기 전 이미 사망했다는 의미다. 잔혹하게 살해될 만큼의 원한을 산적도 없었다. 부부는 주변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고 매주 교회에 나가는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딱 하나 이상한 건 유일한 생존자 박한상이었다. 장례식 전날 영안실을 찾아 실신할 정도로 통곡하더니,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친구에게 전화해 사업 계획을 떠벌렸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사업체를 팔아버리고 외국에 나가 장사를 하겠다는 거였다. 여자친구와 통화하면서는 대놓고 웃었다. 마치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의심은 갔지만 대놓고 추궁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었다는 동정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참고인 조사를 하려 하자, 일부 가족이 “부모 잃고 정신적으로 충격에 빠진 아이에게 무슨 짓이냐”며 공개적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자식이 부모를 이 정도로 잔인하게 죽인다는 건, 그만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 이후 박한상의 종아리에서 발견된 교상. 물어 뜯긴 흔적이다. 치열 대조 결과 아버지의 것과 일치했다. /MBC 유튜브 영상

결정적 증언은 사건 발생 직후 박한상을 치료했던 간호사에게서 나왔다. “머리에 피가 보여서 상처가 있나 하고 봤더니 없더라고요.” 그리고 뒤이어 발견된 종아리의 상처. 사람에게 물어 뜯겨 생긴 인교상(人咬傷)이었다. 치열 대조 결과 아버지 박씨의 이빨 자국과 일치했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부모의 피와 죽어가던 아버지가 남긴 증거로 아들의 죄가 세상에 드러났다. 박한상은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범행을 자백하며 “속이 시원하다, 그동안 잠을 못자 힘들었다”고 했다.

◇ 알몸에 칼을 든 아들, 10여 분간 멈추지 않고 찔렀다

그날 밤 박한상은 속옷까지 다 벗은 알몸으로 자기 방 한가운데 섰다. 이어 침대 시트를 뒤집어쓴 뒤 양손에 등산용 칼을 하나씩 움켜쥐었다. 그렇게 기괴한 모습으로 부모가 잠든 방문을 열었다. 잔혹한 칼부림은 10여 분간 계속됐다.

“부모님 피가 묻지 않게 하려고요. 깨시면 저인지 모르게 하려고. 이렇게 몸을 반쯤 숙인 상태였고요. 어머니가 이쪽에 있어서 침대 커버는 놓친 상태였어요. 제 기억으론 오른손으로 처음에 목 부위를 찔렀던 것 같아요. 그냥 막 계속 찔렀어요. 바로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고 비명소리는, 안 들렸어요.”

피해자인 박한상 부모의 부검 소견서 중 일부. /MBC 유튜브 영상

할 일을 마친 박한상은 욕실로 가 샤워기 물을 틀었다. 몸에 튄 부모의 피와 함께 살인의 흔적들이 모두 씻겨나가길 바라면서. 당시 담당 형사였던 한성희씨는 “화장실에 루미놀(핏자국에 형광색으로 변하는 특수용액)을 뿌렸더니 반짝반짝하는 광채가 엄청나게 났다”고 회상했다.

현장 검증에서 박한상의 표정은 담담했다. 동기를 묻는 말에는 “저에 대한 아버지의 심한 질타. 그게 일단 기본적인 원인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아버지가 어떤 심한 말을 했냐고 다시 묻자 그는 “‘넌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 계시면 제가 재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부잣집 아들 박한상은 어떻게 괴물이 됐나

아들의 말처럼 박씨 부부는 자식에게 엄한 부모였을까. 장남에게 거는 기대는 당연히 컸다. 아버지 박씨는 큰아들이 한의대에 진학해 자신이 일군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다. 강남 8학군으로 집을 옮겼고 매일 교회 목사에게 어떻게 하면 아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있는 집 자식’답게 박한상은 어릴 적부터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고 한의대 진학에도 실패했다. 방위병이었던 군 시절도 불성실 그 자체였다. 매일 저녁 소나타를 몰고 압구정으로 가 화려한 ‘오렌지족’ 생활을 누렸다.

부모님 살해를 자백한 박한상의 현장 검증 후 모습. /MBC 유튜브 영상

제대 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로스앤젤레스 근교 어학원을 다녔지만 잘 나가지 않았고, 자취방에 틀어박혀 폭력 비디오를 탐닉했다. 그러다 또래 유학생을 만나 도박에 손을 댔다. 부모님이 매달 2000달러씩 보낸 생활비 역시 고스란히 도박판에 놓여졌다.

돈이 떨어지자 몰래 귀국해 신용카드를 발급했고 그걸 담보로 사채까지 썼다. 친척에게 들켜 미국으로 다시 넘어갔지만 반복된 도박으로 거액의 빚을 떠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그는 그동안 모든 사고를 수습해 주던 아버지로부터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말을 들었다. 공부를 못해서, 한의대에 못 가서, 한약방을 물려받지 않아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부모에게 실망만 안겼던 아들은 참다못한 아버지의 한마디에 살인을 결심했다. 1994년 5월 13일 귀국한 박한상은 청계천 인근 상가에서 등산용 칼 두 자루와 플라스틱 기름통을 구입하고, 신사동 주유소로 가 휘발유 8리터를 샀다. 그리고 19일 부모를 죽였다.

◇ “난 무죄” 반성 없는 형, 동생은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고 1995년 8월 25일 대법원이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다만 1997년 12월 30일을 마지막으로 국내 사형 집행이 멈추면서 박한상의 삶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박한상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우리도) 사형을 피할 수 있는 명분을 찾기 위해 고심했으나, 고작 피고인의 부모가 살아있을 경우 아들의 사형을 원치 않았을 것이란 추측뿐이었다”고 했다. 어느덧 쉰둘의 중년이 된 박한상은 그동안 판사의 이 꾸짖음을 곱씹어본 적 있을까.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박한상. 이때 그는 몰려든 취재진을 향해 욕설을 했다. /tvN 유튜브 영상

박한상을 만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었다. 박한상은 동생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무죄다.”

그 이후 동생은 형을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30년간 사형수들을 상담해 온 교화위원 고(故) 양순자씨는 박한상의 유일한 면회자였다. 박한상은 6년간 양씨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그 안에 담긴 말은 늘 같았다. 범행을 부인했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부모를 탓했다. 양씨는 저서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에서 박한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강남의 또라이 박한상. 그 아이를 더 이상 상담할 수 없어 포기해 버렸다.”

그는 운 좋게 건진 30년 세월을 돌이키며 무슨 생각을 할까. 사형되지 않고 살아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까.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동생에게 넘어간 유산을 아까워하면서. 아버지의 그 한마디를 여전히 원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