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아들이 살 투룸 자취방을 찾아보러 왔는데 월세만 찾고 있어요. 전세사기가 워낙 무서우니까요…”

지난 1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만난 김모(52)씨는 월세 매물을 찾으러 한 공인중개사 사무소 문을 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부동산도 못 믿겠어서 전세는 도저히 못 구하겠다”며 “매달 빠져나가는 월세가 아깝기는 하지만 전세사기 때문에 전세는 찾아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와 함께 이곳을 찾은 손모(52)씨도 “서민들은 월세 다 내고 나면 대체 집을 언제 살 수 있겠냐”고 푸념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 경매 상황. /경매지도 사이트

대규모 전세 사기가 발생했던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빌라들이 무더기로 임의경매 매물에 나오자 주민들 공포가 커지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이 임의경매로 넘어갔다는 것은,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린 채무자가 원금과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면서 채권자가 그 부동산을 경매에 넘겨 대출금을 회수하려 한다는 뜻이다.

전국의 부동산 법원 경매·공매 매물 현황을 보여주는 ‘경매 지도’를 보면 화곡동의 실태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8일 법원경매정보에 따르면, 서울시 경매 물건 중 주거용 건물은 907건인데 이 중 강서구 매물만 해도 367건(40.4%)이었다. 화곡동에서 나온 매물은 308건이었다. 서울 시내에서 경매로 나온 주거용 건물 3채 중 1채가 화곡동에 있었던 셈이다.

(서울=뉴스1) 이승배 기자 = 이른바 '빌라왕' 등 전세 사기 피해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지난해 11월 기준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파악한 상위 30위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집중 관리 다주택 채무자(악성 임대인)의 지역별 통계에 따르면,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발생한 전세금 미반환 사고가 737건으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서울 전 지역 사고의 41%를 차지한다. 사진은 9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빌라 밀집 지역. 2023.1.9/뉴스1

화곡동 지역은 재작년 말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고 건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2022년 11월 기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화곡동에서만 전세금 미반환 사고가 737건 발생해 전국 1위를 기록했다. 서울 전 지역 사고(1769건)의 41.6% 수준이다.

◇화곡동 공인중개사들 “전세사기 사태 이후 매물 60~70% 수준으로 줄어”

본지가 지난 1일 오후 화곡동 일대 공인중개사 20곳을 돌아봤다. 본지와 만난 공인중개사들은 “빌라왕 사태 전보다 거래 건수가 현저히 줄었다”고 말했다. 화곡동의 한 공인중개사 A씨는 “전세사기가 터진 재작년(2022년) 하반기 이후 60~70% 수준으로 전세 매물이 줄었다”며 “아직도 그 이전으로는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공인중개사 B(47)씨는 “보증보험 가입 요건이 강화되면서 전세 보증금이 2억2000만원에서 1억4000만원 수준으로 떨어졌다”고도 했다.

지난해 5월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이른바 ‘전세 사기꾼’을 막겠다는 취지로 보증보험 가입 요건을 강화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선량한 애먼 임대인들까지 피해를 본다”는 반응도 나왔다. 공인중개사 B씨는 “빌라왕처럼 1000채씩은 아니어도 집 2~3채쯤 갖고 있던 집주인들이 주식과 코인에 현금을 묻어뒀다가 이번에 꼼짝없이 물렸다더라”며 “세입자들한테 7000만원씩 돌려준다고 치면 2억 아니냐. 현금은 묶여 있는데 보증금은 내려가고, 돌려줄 돈은 없어 궁지에 몰린 셈”이라고 했다.

전세사기 이후 화곡동 일대 공인중개사 사무소 중에는 폐업한 곳도 생겨났다. 화곡동 곰달래로 반경 300m 빌라촌을 돌아 보니, 공인중개사 사무소 10곳 중 3곳이 문을 닫았다. 까치산역 일대에는 10곳 중 1곳이 폐업한 상태였다.

◇피해자들 “‘셀프 낙찰’ 안 받으면 신용불량자 신세될까 두려워”

화곡동 지역의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전세사기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반응이다. 화곡동의 한 오피스텔에 사는 박모(39)씨는 본지 통화에서 “2021년 7월에 2억2000만원으로 전세 계약한 집이었는데 실제 시세는 1억5000만원 전후더라”며 “계약 두 달 후 집주인이 사망해 곧바로 공매(公賣) 절차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박씨의 집은 현재 6차 공매까지 넘어 갔는데, 직접 ‘셀프 낙찰’을 받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집을 압류받을 신세라고 한다. 그는 “주변에는 15~16차례나 경매가 유찰돼 벌벌 떨고 있는 피해자들도 더러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화곡역 3번 출구 앞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강서구 대책위원회'에서 피켓 시위를 열고 있는 모습. /김영관 기자

박씨와 같은 전세사기 피해자들 중 일부는 직접 거리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강서구 대책위원회(대책위)는 화곡역 앞에서 피켓 시위를 열었다. 오는 28일 ‘인천 건축왕’에게 보증금 7000만원을 떼이고 돌려받지 못해 숨진 30대 남성의 1주기를 앞두고 열렸다.

대책위 관계자는 “강서구민들에게 전세사기는 끝난 문제가 아니다”라며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고 ‘돈 없으면 소송을 시작하지도 못하는 현실’을 문제삼고자 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화곡역 3번 출구 앞에서 열린 집회에는 대책위 관계자들이 참석해 피켓을 들었다. 피켓에는 ‘엄마 미안… 집주인이 돈을 안 줘 너무 힘들어’ ‘전세사기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등의 문구가 적혔다. 이들은 “전세사기 문제 해결될 수 있게 관심을 가져 주세요” “전세사기 특별법이 개정되지 않고 있는데 관심을 가져 주세요”라는 구호도 외쳤다.

이날 한 집회 참가자는 “예전에는 대출도 쉽게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특별법에 나와 있는 대출을 해달라고 신청했더니 이마저도 막혀 버렸다”며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