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29일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평도 부근 바다 위 해군 전진기지에서 하루가 시작됐다. 나는 참수리로 불리는 고속정 3척 편대의 편대장을 보좌하는 작전관으로 2001년 여름 2함대 사령부로 발령이 난 이후 근 1년 정도 근무하면서 어느 정도 연평도 현장에 익숙한 중위 계급의 장교였다. 우리의 임무는 적 함정이 움직일 때나 우리 어선들이 조업통제선을 넘어가면 긴급 출동을 통해 적 함정에 대응하고 어선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2002년 6월 29일 그날 날씨는 매우 화창했으나 유난히 어선들이 속을 썩였다. 조업통제선을 넘은 어선 한 척을 힘들게 붙잡았고 그 옆으로 내가 타고 있던 358호정과 윤영하 정장님이 타고 있던 357호정이 나란히 붙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출동 전에 마트에서 구입한 조미김을 윤영하 정장님에게 던져주었고 서로 웃으면서 오늘도 잘해보자고 파이팅을 외쳤다.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군과 교전 후 침몰한 참수리 357호정을 인양하는 모습. 윤영하 정장을 비롯해 6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 함정이 남하한다는 지시를 받고 차단 기동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차단 기동은 적 함정이 내려오면 T자 형태로 그 앞을 가로질러 움직이면서 막아내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적 함정 주변을 약 1000야드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3바퀴 돌면서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미 우리는 가까이서 적 함정을 대응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 지시가 특별한 지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편대장님이 함께 승선한 358호정이 앞에 서고 윤영하 정장님이 타고 있는 357호정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적 함정 앞을 가로지르며 바라보는데 정말 믿기지 않게 적 함정의 포에서 우리 뒤를 따르던 357호정을 향해 불을 뿜는 사격이 시작됐다.

펑펑펑 포성이 울려퍼지는 순간 편대장님이 쏴라 쏴 하면서 우리 측이 발사하는 포탄 소리와 적의 포탄 소리가 엉켰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10~20미터 앞에 적이 발사한 포탄이 떨어지고 물기둥이 솟았다. 내가 타고 있던 358호정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적 함정을 향해 사격을 했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다. 적 함정에 우리가 쏘는 포탄이 계속 정확히 명중하고 있었고, 적 함정의 갑판 위에 있던 적군 여러 명이 쓰러지는 모습, 갑판 위에서 불기둥이 솟았다가 꺼지는 장면이 반복됐다. 그런데 도무지 적 함정은 침몰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 적 함정은 퇴각했다.

근처에 있던 357호정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적 함정이 퇴각하고 자체 기동력을 상실한 357호정은 수많은 적 포탄을 맞아 배가 약간 기울어진 상태로 화재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357호정 옆에 접안하여 사상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함미 발칸포에 앉아있던 황도현 하사 시신을 꺼내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뇌수가 흘러내렸다. 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했다.

우리는 357호정을 로프에 연결해 예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수가 심하던 357호정은 점점 더 가라앉기 시작했고, 더 이상 예인이 불가하다고 판단해 연결 로프를 끊고 357호정이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연평도로 사상자를 옮기는 와중에 배 위 갑판에 누워있는 전사자 윤영하 정장님을 봤다. 매우 편안하게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혹시 정장님의 휴대폰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내가 건네주었던 조미김이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이 교전을 서해교전 또는 제2연평해전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무모하게 맨몸으로 적을 가로막는 차단기동이나 몸으로 들이받는, 우리가 ‘바이킹’이라고 부르던 충돌 작전은 없어졌을 것이다. 서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성인 남성이 주먹을 꽉 쥐고 서로에게 달려가라고 했을 때 어느 한쪽이 주먹으로 선제 공격을 가한다면 맞은 쪽은 쓰러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상황이 그랬다. 교전 규칙에 따라 선제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렇게 가까이 붙으라는 명령은 절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시 내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난 매우 두려웠다. 솔직히 어디 숨고 싶을 정도로 두려웠으나 좁은 함정에서는 숨을 곳이 없었다. 그리고 명색이 장교 신분으로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다. 내 곁에 있던 사병들은 오죽했을까! 유독 사슴 눈망울처럼 큰 눈을 가진, 전입 한 지 얼마 안 된 수병이 기억난다. 그는 얼마나 두려웠을지, 그리고 지금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벌써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6월 29일이 되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매년 제2연평해전 기념식이 열리지만, 전역 후 나는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날 357호정과 함께 전투를 치른 358호정에 함께했던 전우들도 다 마찬가지리라. 우리도 기념식에 초대해 달라, 우리도 대접해 달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그날을 함께했던 전우들이 보고 싶고 함께 만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국가가 마련해 줬으면 한다. 내가 경험한 제2연평해전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싸운 젊은이들을 그리고 현장에 함께했던 이들을 국가가 조금만 더 세심하게 보듬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서해 최전방 바다 위 흔들리는 조그만 함정에서 주머니에 있는 조미김을 꺼내 따뜻한 식사 한 끼 못 하고 떠나신 윤영하 정장님이 너무나 보고 싶다. 그리고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그날이 되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그날 연평도에서 함께했던 357호정, 358호정 전우들이 보고 싶다.

☞차단(遮斷) 기동

해군에선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불린다. ‘햇볕 정책’을 펴던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연평해전 때 서해 북방한계선(NLL) 밑으로 남하하는 북한 함정을 우리 함정으로 밀어내는 ‘몸싸움’을 벌이면서 확립된 작전이다.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교전 규칙이었지만 적의 기습 공격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