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졌다면, 우린 아오지 탄광의 암흑에 갇혀 삶을 끝내야 했을 겁니다.”

24일 오후 12시 30분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만난 유지혜(54)·장은서(33) 모녀(母女)는 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인 유기준씨의 가묘(假墓) 격인 현충탑을 참배했다. 현충탑 지하의 위패봉안관 벽면에 새겨진 유기준씨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던 두 사람은 말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24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국군포로 유기준씨의 가묘(假墓) 격인 위패 봉안관을 참배하는 딸 유지혜(오른쪽)씨와 외손녀 장은서(33)씨. 장씨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향해 고인이 6·25전쟁 금화지구 전투 등 전공으로 받은 화랑무공훈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괴뢰군 포로의 후손'이란 낙인에 신음했던 모녀는 "탈북 후 대한민국 사회에서 원하는 삶을 살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고인은 전북 익산에서 1926년에 태어나 6·25에 참전했다. 6·25 내내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강원 철원·금화·평강)’ 금화 지구 전투에 참전,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1952년 북한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정전 이후에도 북으로 끌려가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유기준씨는 평생 대한민국의 고향을 그리워하다 1990년대 후반 숨졌다.

‘괴뢰군 포로’란 낙인이 찍힌 유기준씨는 물론, 딸 유지혜씨와 외손녀 장은서씨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유지혜씨는 교사가 꿈이었지만 ‘반동의 피’를 물려받은 그에게 북한 독재정권은 어떠한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무슨 교사냐”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고 고교 졸업 이후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 2004년 홀로 탈북해 한국에 왔다.

장씨의 삶 역시 ‘반동 포로와 탈북자의 후손’이라는 이중의 족쇄가 채워졌다. 고등학교에 등록은 돼 있었지만 남의 집에서 식모 일을 하며 하녀처럼 살았다. 장씨도 고교 졸업 이후인 2008년부터 아오지 탄광에 끌려갔다. 장씨는 탄광의 삶을 “짐승보다 못한 삶”이라고 표현했다.

헬멧 하나에 의지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막장에 기어들어가 12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기가 섞인 물이 갱 내에 항상 흘러 감전의 위험도 컸다. 화장실도 마땅히 없어서 항상 폐갱에서 용변을 봤다고 한다. 석탄 마대를 들고 내려오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적도 있다. 국군 포로 외할아버지, 탈북한 어머니 때문에 그는 동네에서 ‘요주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런 시선을 받기 싫어 남들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이미 찍힌 낙인을 거둘 수가 없었다.

2011년쯤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어머니 유지혜씨와 연락이 닿은 장씨는 마침내 2012년 1월 한국에서 어머니와 재회했다. 2015년 탈북민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통일부 산하 법인 ‘프리덤스피커즈인터내셔널(Freedom Speakers International·FSI)’을 알게 됐다. 이곳에서 원어민 자원봉사자와 FSI 케이시 라티그 공동대표에게 영어를 배웠다.

장씨가 아오지 탄광의 경험을 담은 영어 책 ‘검은 화장을 한 소녀(Girl with Black Makeup·FSI출판)’가 25일 아마존에 발매된다. ‘검은 화장’이란 탄광에서 묻은 석탄 가루로 인해 검게 된 얼굴을 뜻한다. FSI 이은구 공동대표의 권유로 출판할 수 있게 됐다. 장씨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검은 화장을 한 소녀였습니다. 나는 국군 포로의 후예였고, 다른 길을 선택할 자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장씨는 이날 “대한민국은 내게 자유와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며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에서 강제 노역으로 질병과 부상에 시달렸던 장씨는 지난해 9월부터 간호조무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왔다. “나처럼 몸이 아팠던 이들을 보살펴 주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