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인천상륙작전 74주년 기념식이 열린 인천 중구 1·8부두 개항광장.

가슴에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단 참전 용사 이영환(92)씨가 단상 위에 올라섰다. “필승!” 아흔이 넘은 노병은 꼿꼿한 자세로 서서 거수경례를 했다. 그는 이날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장병을 대표해 회고사를 낭독했다.

11일 인천상륙작전 74주년 기념식에서 참전 용사들을 대표해 회고사를 낭독한 이영환(92)씨. 사진은 전날 서울 광진구 자택 앞에서 찍은 것이다. 가슴에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달았다. /박상훈 기자

“인천상륙작전은 위기에 몰렸던 우리나라를 지키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한 위대한 작전이었습니다. 지금도 자부심이 큽니다.”

이씨는 만 18세 나이에 해병대원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1932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1949년 해군으로 입대했다가 소속 부대가 해병대로 재편되면서 해병이 됐다. 군대에 가면 굶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원 입대했다고 했다.

그러나 곧이어 6·25전쟁이 터졌다. 그가 속한 부대는 ‘통영상륙작전’에 투입돼 경남 통영 탈환에 일조했다. 이어 1950년 9월 부산항에서 미군 상륙함에 올랐다. “일본으로 훈련을 간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며칠 뒤 배가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 있는 겁니다. 그제야 소대장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당사자들한테까지 극비였던 거죠.”

이씨는 당시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서웠습니다. 군산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모님이 나 대신 오래오래 사시길 빌었다”고 했다.

당시 함께 배를 탄 해병대원들은 끌어안고 울면서 서로를 응원했다고 한다. 이어 곳곳에서 “나라가 위급하니 싸워서 이기자” “이겨서 꼭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나왔다고 했다. 당시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상황이었다.

이씨는 9월 15일 오후 6시쯤 현재 인천 중구 북성동 일대 해안에 상륙했다. 미 해병대와 대한민국 해병대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고 한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8국 함정 261척과 병력 7만5000명이 차례로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10m에 달해 상륙함이 해변에 접근하기 어렵고 수로도 좁았다. 하지만 결국 작전에 성공하며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됐다.

해변은 처참했다고 한다. 그가 상륙한 해안가 북한군 진지에선 발목이 쇠사슬로 묶인 채 죽어 있는 소년병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저항하다 죽으라는 공산 괴뢰의 잔혹함을 봤다”고 했다.

인천에 상륙한 군은 서울로 진군했다. 태극기를 들고 나온 시민들과 전투식량을 나눠 먹기도 했다. 9월 27일 오전 6시쯤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다시 게양할 때 그는 중앙청 주변에서 경계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씨는 “태극기가 다시 게양될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제대한 미국 군인들이 ‘베테랑’이라고 불리며 존중받는 모습이 부러웠다고 한다. “우리 참전 용사들은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살고 있어요.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죠.”

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양용모 해군참모총장은 “성공 가능성이 5000분의 1에 불과했던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과 손원일 제독, 용감하게 적진으로 돌격한 많은 장병의 용기와 헌신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며 “참전 용사들을 영웅으로 기억하고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번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