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법적으로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힘부터 쓴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오래전 서양에서는 재판의 한 방법으로 결투를 사용했답니다. ‘결투 재판’(judicial duel)에서는 서로 다툼이 생긴 사람들끼리 결투를 벌인다면 신이 옳은 사람의 편을 들어 승리하도록 해줄 테니 정정당당한 두 사람의 결투가 재판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 거죠.

1409년 독일의 결투 재판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중세는 기독교 신앙이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신의 시대였습니다. 결투 재판은 신의 뜻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재판한다는 이른바 ‘신명재판(神明裁判)’의 하나였어요. 성경 구절엔 ‘재판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니...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증인이나 증거가 없어 입증하기 어려운 범죄 사건에 대해 당사자들이 결투를 벌여 신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피해를 입증하기도 어려웠고, 보상으로 돈을 받는 게 오히려 명예를 더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결투로 재판과 처벌까지를 겸하려고 했어요. 합법적인 싸움인 셈이었죠. 결투에서 승리한 자는 무죄가 되고, 패한 자는 유죄가 됐습니다.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 결투 재판을 금지하는 법안을 도입하고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결투 재판은 19세기까지도 관습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옳고 그름을 가리던 결투가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에요. 옛 영화에서 “당신은 내 명예를 더럽혔소!”라고 외치며 즉석에서 장갑을 던지고 칼을 빼어 드는 장면을 봤을 거예요. 이런 결투는 17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어요. 당시에 칼을 빼들고 결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마치 중세의 기사처럼 귀족의 혈통, 혹은 고귀한 신분임을 뽐내는 일이었던 거예요. 1685년부터 1716년 사이에 프랑스 장교들이 벌인 결투는 1만 건이 넘었고 400명 이상 사망했다는 연구 자료도 있어요.

혁명으로 귀족 신분이 점차 사라진 18세기에도 결투는 더 증가했어요. 새롭게 지배 엘리트층이 된 부르주아들, 즉 신사와 군인들은 스스로 ‘고귀한 신분’이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기 때문에 과거의 귀족⋅기사⋅장교들이 벌이던 결투를 따라 하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원래 귀족이 아니라서 어려서 검술을 배우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쓰기 어려운 칼 대신 신문물이자 누구나 방아쇠만 당기면 쏠 수 있었던 권총을 이용해서 결투를 벌였습니다. 상대를 죽이자고 벌이는 결투가 아니고 ‘신사의 품위’를 보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결투의 폭력성을 억제하는 차원에서 결투의 절차를 세세하게 규정하는 법도 있었어요. 1777년 만들어진 ‘아일랜드 결투법’의 경우는 결투 때 지켜야 할 사항 26가지를 규정해두기도 했죠.

하지만 계몽의 시대인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이런 사적인 폭력은 금지돼야 한다는 비판이 점점 높아져요. 미국은 1839년 결투를 불법으로 규정했어요. 국가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개인들 간의 사적 결투가 불가능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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