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화가 가운데 그 작품이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풍속도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나, 미인도를 그린 혜원 신윤복이 아닙니다. 바로 19세기 말~20세기 초 활동한 기산(箕山) 김준근이었어요. 그의 작품은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덴마크, 러시아,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모두 1000여 점이 남아 있습니다. 이 가운데 독일 MARKK(옛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 있는 김준근의 풍속화 70여 점이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3월 1일까지 전시됩니다. 김준근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수수께끼의 ‘개항장 풍속화가’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습니다.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이 강압적으로 맺은 불평등 조약이자 조선 침략의 시작이었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이 처음으로 세계를 향한 문을 활짝 열고 부산(1876년), 원산(1879년), 인천(1880년)의 세 항구를 여는 계기가 된 조약이기도 했어요. 이 항구들에서는 외국인의 치외법권이 보장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어요. 치외법권은 다른 나라 영토에서 활동하지만 그 나라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권리를 말해요.
여기서 생활하던 세계 각국의 외국인들은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의 일상과 풍습을 신기하게 여겼어요.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조선의 모습이 담긴 기념품을 가져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사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죠. 이때 화려한 색채로 조선 사람들의 풍속화를 그려 판매한 화가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김준근이었죠.
지금까지 김준근의 생애에 대해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된 서양 문학 작품인 ‘텬로력뎡’(천로역정) 등 몇몇 책의 삽화를 그렸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에요.
◇풍속화의 백과사전
김준근의 붓은 서양인들이라면 눈을 휘둥그레 뜰 만한 일상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생업, 의식주, 의례, 세시풍속, 놀이, 공연예술에서부터 형벌, 교육, 기생, 광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아주 쉬운 필치로 그려냈습니다. ‘풍속화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했어요.
이렇게 조선의 풍속화를 그려 외국인에게 판매하는 일은 그 이전에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김준근은 미술의 상품화라는 근대미술의 특징을 그때 벌써 터득했던 것이죠. 심지어 ‘한정판 그림 100장 세트’를 만들어 판매했는데요. 요즘 기준으로 보면 마케팅에도 아주 뛰어났던 거죠. 각국의 외교관, 여행가, 선교사, 상인, 군인들이 앞다퉈 그의 그림을 사서 귀국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삼류 화가'에서 ‘K컬처의 원조’로
김준근의 그 많은 그림들은 조선 말의 우리 민속과 생활 풍습을 생생하게 담은 훌륭한 ‘기록화’ 역할을 하고있어요. 세계로 흩어진 그의 그림을 현재 주로 각국의 민속박물관이나 민족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그림들 중 ‘망근장이’는 한자리에서 망건과 갓을 만드는 장인 네 명의 모습을 그렸어요. 망건은 옛날에 상투를 튼 사람이 머리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물건이에요. 1895년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점차 사라졌지요. 그러기에 ‘망근장이'는 아주 귀중한 그림이지요. 당시의 전통 결혼식 풍경과 단옷날 그네뛰기하는 여성, 두부를 만드는 모습을 그린 그림 등도 남겼답니다.
기산 김준근은 1980년대 이전까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습니다. 처음엔 ‘기량이 떨어지는 삼류 화가’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에게 ‘조선 최초의 국제 화가’ ‘K컬처의 원조’란 수식어가 붙고 있습니다. “장승업 같은 천재 화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삼류는 아니었고, 18세기 김홍도 풍속화의 성취를 계승한 화가”라는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죠. 기산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아직 남아있는 풍속과 영영 사라져버린 풍속이 무엇인지 꼽아보는 건 어떨까요?
‘천로역정’ 삽화도 그렸어요
‘천로역정’은 영국의 존 버니언이 1678년 출판한 종교 소설이에요. 한 기독교도가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천국으로 간다는 내용을 우화 형식으로 풀어 쓴 작품인데요. 영국 근대문학의 선구작으로 꼽힙니다. ‘천로역정’은 약 120국에 소개됐어요. 신앙 서적 중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란 말이 있을 정도예요.
우리나라에선 1895년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이 번역해 소개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 소설이었죠. 당시 제목은 ‘텬로력뎡’이었습니다. 화가 김준근이 판화로 삽화를 그려 넣었어요. 그림의 등장인물들은 한복과 갓을 쓰고 있고, 특히 천사의 모습은 한국 고전에 나오는 선녀의 모습이었어요. 또 몇몇 그림엔 원근법도 사용됐어요. 특히 한국어 번역 초판은 김준근의 그림들이 있기 때문에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평가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