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6일 아침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의 주노 지역으로 상륙하고 있는 캐나다군.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길이 80km에 달하는 노르망디 해안을 5개 구역으로 나눠 진행됐습니다. /영국 임피리얼 전쟁 박물관

현충일이었던 지난 6일은 유럽에서도 의미 있는 날이에요. 바로 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데 발판이 된 사상 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개시된 날입니다. 매년 프랑스 노르망디와 영국 포츠머스에서 동시에 기념식이 열려요. 특히 올해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77주년을 맞아 상륙 작전에 참가했다가 숨진 영국군 소속 전사자 2만2442명을 추모하는 야외 기념관이 프랑스에 문을 열었답니다.

뭔가를 계획한 날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줄 때 보통 ‘디데이(D-Day)’라고 하죠. 군사 작전에서도 공격 개시일을 뜻하는 말로 쓰여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디데이는 1944년 6월 6일이었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계기로 히틀러의 독일에 맞선 미국·영국 등 연합군이 유럽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갖게 됐어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왜,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을까요?

◇제2 전선을 만들기 위한 연합군의 결정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樞軸國·Axis-powers)과 영국·프랑스·미국·소련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聯合國) 사이에서 일어났어요. 1943년 9월 연합국은 무솔리니가 이끌던 이탈리아의 항복을 받아냈고, 유럽에서 독일과의 한판을 남겨두고 있었죠. 당시 독일은 프랑스(1940년 점령) 등 서유럽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였어요. 동부 전선에서 소련은 홀로 독일군에 대항해 처절하게 싸우는 중이었죠. 이에 소련의 스탈린은 서쪽에서 새로운 전선을 형성해서 동서 양쪽에서 독일을 압박하자고 제안했어요. 1943년 11월 연합국 대표들은 이란 테헤란에서 회담을 갖고 프랑스 북부에서 상륙 작전을 실행할 것을 결의합니다.

구체적 상륙 지점 후보지는 네 곳이 있었어요. 브르타뉴, 코탕탱 반도, 파드칼레, 그리고 노르망디였죠. 그중 노르망디는 영국과의 거리가 적당해 병력 이동이 수월하고 80㎞에 달하는 기다란 해안선과 평탄한 해변이 있어 상륙에 적합했기 때문에 작전 장소로 결정됐어요. 당시 노르망디는 이미 프랑스를 4년 가까이 통치한 독일이 대규모 포대와 방어 시설을 두었던 곳이었죠. 연합군은 독일이 만든 방어 시설을 조사하는 등 철저한 준비 작업을 했어요.

◇치밀한 교란 작전

독일은 연합군이 파드칼레 해안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영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연합군이 거짓 작전 내용을 무전으로 흘리고 일부러 파드칼레 해안에서 모의 훈련을 하는 등 독일군을 속이는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죠. 영국은 영화 제작사의 무대 장치팀까지 동원해 파드칼레 해안 맞은편에 있는 영국 도버 해안 곳곳에 가짜 기름 탱크와 발전소도 지었어요. 독일군은 연합군이 파드칼레에 상륙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곳에 병력을 집중했죠.

연합군은 2년여에 걸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결전의 날인 6월 5일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생겨요. 6월 4일부터 강풍과 높은 파도 때문에 도저히 작전을 전개할 수 없게 된 거예요. 연합군은 일단 작전을 연기하기로 합니다. 독일 해군의 기상 전문가들 역시 날씨를 고려하면 당분간 연합군의 상륙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예측했어요. 그래서 독일군의 많은 고위급 지휘관들은 방심하고 휴가를 가거나 자리를 비웁니다.

하지만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지상군 사령관이었던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다음 날 기상 상태가 약간 좋아질 것이라는 예보가 나오자 작전을 강행하기로 합니다. 조류를 고려하면 상륙에 적합한 다음 날짜는 한 달이나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죠. 이로써 공식 작전명 ‘넵튠(Neptune)’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실행됩니다. 넵튠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영어식 이름이에요.

◇육·해·공 16만 병력 투입된 ‘디데이’

결전의 날을 앞두고 39개 사단으로 구성된 연합군 300만명가량이 영국 남부에 모였어요. 6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자정, 미·영국군 공수대가 후방에 침투하여 거점을 확보하고, 이어 공병대가 해안 방어물을 제거하려 투입됩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에 있는 총 5곳 지점으로 침투했어요. 오전 6시 30분 오마하·유타 해변에는 미군이, 오전 7시 30분~8시 골드·소드·주노 해변에는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상륙했어요. ‘디데이’ 하루 동안 16만 병력이 프랑스 북부 땅을 밟았는데, 여기엔 선박 6500척과 항공기 1만2000대가 투입됐어요. 그야말로 육·해·공이 모두 투입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 작전이었어요.

독일군 저항도 만만치 않았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원래 3주 만에 끝내기로 계획됐지만,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가기까지 두 달 반이나 걸렸어요. 1900년 이래로 최악의 태풍이 온 기상 상황도 진격 속도를 늦췄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끝 알리는 신호탄

연합군은 6월 30일 노르망디를 확보한 뒤 7월 초까지 약 100만명 군사와 17만대 차량을 상륙 시키는데 성공했어요. 7월 말까지 연합군 사상자는 12만명, 독일군은 11만3000여명이었어요. 연합군은 8월 마침내 프랑스 파리로 들어가 파리 시민을 해방시켰어요. 이후 벨기에로 밀고 들어가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도 반격에 나섰죠.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에는 “연합군이 승리하는 속도보다 독일군이 패배하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말이 나올 만큼 전세는 연합국으로 기울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죠. 이 때문에 “노르망디의 성공으로 전쟁의 끝이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중요하고 치열한 전투였기에 당시 연합군 병사들은 추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디데이가 (전쟁 중) 가장 긴 하루였다”고 말했어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한 미군들이 프랑스 어딘가에 있는 라이언 일병을 구해오라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며 겪는 이야기예요. 특히 영화 초반 약 30분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중 가장 치열했던 오마하 해변 전투 장면은 실감나게 묘사된 전쟁 장면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오마하 해변은 다른 해변 전투와 비교해 미군 사상자도 많고 치열했던 전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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