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장면이에요. 장 피에르 우엘 작품.
농민이 성직자와 귀족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모습을 그린 만평. 평민을 착취하는 신분제는 프랑스 혁명의 이유 중 하나였어요.

오늘(7월 14일)은 프랑스 최대 국경일인 혁명기념일(Bastille Day)이에요. 1789년 7월 14일 발생해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기념해 제정됐죠. 매년 기념일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열리는데, 작년엔 코로나로 취소됐지만 올해는 다시 열린다고 해요. 수백년간 유럽을 지배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씨앗을 뿌린 프랑스혁명,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경제난으로 불만 폭발하다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여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가뭄과 흉작 등으로 물가가 폭등한 반면 노동자 임금은 오르지 않아 서민들은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죠. 생활비의 80% 이상을 빵값에 지출하는 상황이었어요. 신분제의 모순도 드러났어요. 당시 프랑스의 신분제는 성직자·귀족·평민 등 3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인구의 2%에 불과한 성직자와 귀족은 전 국토의 30%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면세 특권까지 누렸죠. 평민들은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어요. 특히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들 불만은 극에 달했답니다.

왕실의 사치 등으로 재정 적자가 심각한 상황에서 1774년 루이 16세(재위 1774~1792)가 즉위하며 상황은 더 악화됐어요. 루이 16세는 영국에 대항하려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어요. 결국 미국이 승리하긴 했지만, 프랑스는 1년 세입의 4배(20억 루블)를 전쟁 비용으로 지출했죠. 루이 16세는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귀족에게도 세금을 매기겠다고 했어요. 이에 귀족들은 “삼부회만이 이를 결정할 수 있다”며 반발했죠. 삼부회는 신분 대표들로 구성된 국왕 자문 기구였는데, 1614년 이래로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상태였어요. 루이 16세는 마침내 1789년 5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17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했어요. 그런데 평민들은 삼부회 표결 방식에 불만이 있었어요. 평민 대표 수가 귀족과 성직자를 합한 것보다 많았지만, 신분별로 한 표씩만 행사할 수 있는 투표 방식 때문에 평민이 항상 2대1로 질 수밖에 없었죠. 평민 대표들은 1인1표와 공평한 과세 등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러자 1789년 6월 13일 평민들은 성직자와 귀족 대표들을 배제하고 별도의 ‘국민의회’를 결성했어요. 민중은 이들을 지지했고, 결국 성직자와 귀족 대표들까지 국민의회에 합류하며 삼부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혁명의 시작 ‘바스티유 감옥 습격’

루이 16세는 겉으론 국민의회를 인정하는 척했지만, 뒤로는 의회를 강제 해산하기 위해 국경에 있던 군대를 베르사유 궁전 근처로 집결시켰어요. 이를 알게 된 파리 시민들은 큰 배신감을 느꼈죠. 결국 1789년 7월 14일 성난 파리 시민들은 파리 동부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어요. 우뚝 솟은 바스티유 감옥은 봉건제도의 상징이자 정치범 수용소로 유명했죠. 시민들은 원래 억울한 정치범을 풀어주고 무기를 얻으려 이곳을 습격했어요. 하지만 실제 감옥엔 일반 범죄자 5명과 정신 이상자 2명뿐이었고 무기도 별로 없었대요. 이때 시민들이 사용한 삼색기가 지금 프랑스 국기가 됐어요. 당시 밤새 사냥을 하고 돌아와 쉬고 있던 루이 16세는 이 소식을 듣고 신하에게 “반란이냐”라고 물었고 신하가 “아니요.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국민 주권 명시한 ‘인권 선언' 발표

이후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국민 주권, 법 앞의 평등 등이 담긴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선언)을 발표했어요. 하지만 루이 16세는 인권선언 승인을 계속 미뤘어요. 가뜩이나 치솟는 물가에 화가 난 시민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부녀자가 대다수를 차지한 시민들은 폭우 속에서 “빵을 달라”고 외치며 20㎞ 넘는 거리를 행진했어요. 루이 16세는 그제서야 인권선언을 승인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늦었어요. 시민들은 베르사유 궁으로 쳐들어가 루이 16세 일가를 사로잡아 파리 튀일리 궁에 가둬버렸어요.

루이 16세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해 1791년 6월 어느 날 새벽 몰래 도망가려 했지만 국경 부근에서 붙잡히고 맙니다. 이후 입헌 왕정을 표방한 헌법이 제정됐고, 입법의회가 소집됐어요.

◇단두대에서 사라진 루이 16세

프랑스 혁명의 바람이 자신들에게도 불어 닥칠 것을 두려워 한 오스트리아 등 주변 국가들은 루이 16세의 절대왕정을 지지하고 나섰어요. 그러자 프랑스 혁명 정부는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어요. 하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8만 연합군에 대항하는 프랑스군은 5만명에 불과했고 장교들은 싸움에 소극적이었죠. 패전이 계속되자 의회는 국민을 대상으로 “조국이 위기다. 의용군으로 자원하라”는 격문을 발표했어요. 자유를 쟁취하려는 프랑스 의용군들은 점점 늘어났고, 결국 프랑스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국내에선 급진적 성향의 공화파들이 국왕 일가를 체포했어요. 의회는 왕권을 정지시켰고 1792년 9월 20일 새롭게 국민공회가 들어서며 공화정이 선포됐어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사라져야 한다고 판단한 국민공회는 왕의 처형 여부를 표결에 부쳤는데 387대 334로 사형이 결정됐어요.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파리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같은 해 10월 같은 곳에서 처형됐어요.

이후 나폴레옹이 179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며 프랑스혁명은 10년 만에 막을 내렸어요. 비록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 다시 제정 시대가 열렸지만, 시민들의 힘으로 일으킨 프랑스혁명은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답니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혁명 시기인 1792년 의용군들이 부른 노래예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병 장교 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이 하룻밤 만에 가사와 멜로디를 지었대요. 정식 국가로 채택된 건 1879년이에요. “적들의 피로 밭고랑을 적시자” 등 호전적 내용 때문에 한때 가사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프랑스 국민은 혁명 정신이 담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