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백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되는 해예요. 1971년 7월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이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유물 4600여 점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한 우리나라의 고대 왕릉은 이것이 유일한데요, 무덤에 묻힌 주인공인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은 어떤 임금이었을까요?

◇왕 네 명, 잇달아 비명횡사했어요

백제는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 송파구)이 함락됐고, 백제 21대 왕인 개로왕(재위 455~475)은 살해당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전쟁에서 수도를 빼앗기고 임금이 잡혀 죽었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나라가 거의 멸망하는 위기를 맞았다는 얘깁니다. 마침 신라에 구원병을 얻으러 가 화를 피했던 개로왕의 아들(또는 동생) 문주는 남쪽 웅진(충남 공주)을 새 도읍으로 삼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래픽=안병현

그러나 나라는 쉽게 안정되지 못했고 귀족 세력이 왕권을 넘보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주왕(재위 475~477)은 즉위 2년 뒤 귀족의 손에 살해됐고, 그 아들 삼근왕(재위 477~479)도 2년 뒤 15세 나이로 갑자기 죽었는데, 정변이 일어나 살해됐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479년 왕위에 오른 문주왕의 조카 동성왕(재위 479~501)은 왕권 안정 정책을 추진해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만 말년에는 사치와 향락으로 비난받았고, 사냥하던 중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습니다. 21대부터 24대까지 네 명의 백제 임금이 연속해서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셈이죠.

◇배 타고 일본 가다가 섬에서 태어났어요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새 백제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 바로 무령왕이었습니다. 무령왕은 누구의 아들이었을까요? ‘삼국사기’엔 동성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졌어요. 이 때문에 지금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라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개로왕이 동생 곤지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곤지는 임신 중인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에 갈 테니 형수를 내 아내로 달라”는 요청이었죠.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지만, 개로왕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이를 허락하면서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모자를 배에 태워 돌려보내라”고 했대요. 그런데 규슈 서북쪽 각라도(가당도·가카라시마)란 섬에 닿았을 때 아기가 태어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그 아이가 자라 무령왕이 됐다는 겁니다. 이 얘기는 무령왕이 일본과 뭔가 특별한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데, 실제로 무령왕릉의 목관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키다리 아저씨'가 다시 나라를 일으켰죠

461년생인 무령왕은 즉위 때 만 40세로 당시로선 늦은 나이에 왕이 된 셈이었어요. 하지만 여러 임금의 실패를 옆에서 면밀히 지켜보며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 왕이 됐을 겁니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에 대해 “키가 8척(尺)이고 눈매가 그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고 했습니다. 당시 1척은 약 23㎝이기 때문에 무령왕의 키는 184㎝ 정도로 볼 수 있어요.

그는 동성왕을 살해한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비대해진 귀족 세력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 활발한 대외 교류에 나섰죠. 나라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줬고, 지방 곳곳에 제방 공사를 벌여 떠도는 백성들의 귀농을 유도했습니다. 중국 남조의 양나라, 신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펼치는 국제 네트워크를 재건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성공을 거둬 지금의 황해도 지역인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개로왕 때 뺏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쪽으로는 가야를 압박해 섬진강 일대까지 나아갔습니다.

한마디로 무령왕은 백제의 ‘중흥(쇠퇴하던 것이 중간에 다시 일어남) 군주’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즉위 20년이 지난 521년 백제가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는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한 나라가 됐다)’이란 자신감 넘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올해를 ‘백제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으로 기념하기도 합니다. 무령왕은 백제 왕으로선 참으로 오랜만에 천수를 누리고 61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중흥의 과업을 계승하고 사비(충남 부여)로 천도한 그 아들 성왕(재위 523~554)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무령왕릉은 사대주의 무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행적 등을 써놓은 것)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임을 확실히 알려주는 증거죠. ‘사마’는 무령왕(본명 부여사마)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앞 ‘영동대장군’이란 직함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령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양나라 황제가 백제 왕을 ‘천자의 제후’로 삼으며 준 형식적인 관직입니다. 이런 직함을 무덤 속에까지 기록한 것에 대해 사대주의라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대주의는 주체성 없이 큰 나라를 섬기며 존립을 유지하려는 걸 말해요. 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이 고대 세계의 국제적 관행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오늘날 외국에서 명예박사학위나 명예훈장을 받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죠. 지석은 무령왕의 죽음을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 자를 써서 기록했습니다.